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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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서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9일 (목) 17:32 판 (경복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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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


소개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경복궁 이야기

광화문

광화문.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은 경복궁의 남문, 광화문입니다. 요즘은 광화문 앞 세종로 양쪽으로 정부청사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지요? 조선시대에도 비슷했습니다. 광화문 앞은 의정부와 이조, 형조, 예조 등 육조 건물이 들어섰던 관청거리였거든요. 조선의 신하들은 해치를 바라보며 오늘도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리라 다짐을 했답니다. 광화문은 역사의 증인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타고, 일제강점기에는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는 수모를 당하고 한국전쟁 때는 포화를 맞았지요. 그러다가 1968년 복원하였으나 목재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잘못된 위치에 세워지고 맙니다. 다행히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광화문은 1867년 고종임금님이 중건 했을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건춘문

건춘문.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입니다. ‘봄이 시작되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이곳은 세자를 비롯한 왕실가족과 종친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고종임금이 이 문을 통해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일명 아관파천이었죠. 건춘문 앞에는 늙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줄곧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세자가 배동들과 노는 모습, 미우라의 지시를 받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숨어 들어오던 모습, 건춘문을 빠져나가던 고종임금의 모습. 은행나무는 그 모습들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영추문

영추문.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 대문입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하는 문무백관들은 주로 이 영추문으로 출입했지요. 조선 초기, 경복궁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태조임금은 둘째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왕자를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장성한 첫째 왕비의 아들들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세자 방석을 제거하기 위해 비밀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그때 그들이 드나들던 곳이 바로 이곳 영추문입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히는 연산군은 근정전에서 이곳 영추문에 이르는 구역을 가시로 막아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경회루 연못 서쪽에 만세산이라는 인공산을 만들고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며 즐겼지요.




신무문

신무문.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은 신무문입니다. 경복궁의 북문이지요. 북쪽은 겨울과 죽음, 그리고 강한 음기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은 늘 잠가 두었습니다. 북쪽의 음기가 경복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드물게 이 문이 열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 그리고 임금이 지금의 청와대쪽에 있는 활터로 가려고 할 때면 잠깐씩 신무문을 열곤 했습니다.







동십자각

동십자각.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동십자각은 외로운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높은 망루처럼 생겼는데 이상한 점은 이 건물로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지붕에 잡상과 단청이 있으니 궁궐의 한 건물 같은데 어떻게 혼자서만 나오게 됐을까요? 동십자각은 원래 경복궁 담장 안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궁궐 안과 밖을 경비하던 요새같은 망루랍니다. 옛날에는 이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담장 안에 있어서 여기로 군사들이 오르내렸습니다. 화살과 총탄을 막아줄 여장이라는 방호벽도 있어서 전투시설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의 동쪽 담장이 훼손됐습니다. 앞쪽 성벽도 도로를 넓히느라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몸체인 경복궁과 따로 떨어져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근정전

근정전.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이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입니다. 근정전 앞에 두 개의 기단이 보이는데, 이것을 ‘월대’라고 합니다. 이 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동물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임금님의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수호병 역할을 하지요. 지붕 위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일행들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데요, 잡상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여기 있는 동물들은 모두 쌍쌍입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지요. 근정전 기단 위에는 무쇠그릇이 놓여 있는데 ‘드므’라고 합니다. 드므에는 늘 물을 담아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남산에 불귀신이 살았는데, 얼굴이 아주 흉측하게 생겼답니다. 한번은 불귀신이 경복궁에 불을 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합니다. 목재건물은 불이 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이곳에 드므를 두었던 것입니다.




강녕전

강녕전.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은 임금의 처소, 강녕전입니다. 사정전이 나랏일을 돌보는 일터라면 강녕전은 편안하게 쉬시는 곳이죠. 왕비는 이곳에 함께 기거하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전각에서 생활했지요. 임금님 방이 생각했던 것 보다 좀 작나요? 조선의 임금들은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미덕이었거든요. 조선 19대 숙종임금님은 천둥이라도 치면 자신이 언로를 막은 것은 아닌지, 인사를 잘못한 것은 아닌지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이 곤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강녕전은 모두 9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방과 방 사이에는 모두 문을 만들어 두어 서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또 가운데 마루 쪽의 문은 들어 올릴 수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문을 들어 올려서 시원하게 바람을 들이고, 겨울에는 문을 내려 따뜻하게 지낸 거죠. 우리 건축만의 특징입니다. 또한 강녕전은 근정전처럼 월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실 가족들의 잔치를 열기도 했습니다.





동궁전

동궁전.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은 동궁 영역입니다. 음양오행에서 동쪽은 봄을 뜻하지요.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찬 계절인 만큼 미래의 임금이 될 세자의 공간을 동쪽에 두고 동궁이라 불렀답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세자는 세종임금님의 아들인 문종임금입니다. 즉위하기까지 무려 28년 동안이나 살았으니까요. 문종임금은 이곳에 기거하면서 훈민정음 창제도 돕고, 다연발 로켓포인 신기전 성능을 향상시키는 법도 연구했습니다. 장영실과 함께 측우기도 고안했지요. 문종임금의 아내, 세자빈 권씨는 자선당에서 단종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원손아기씨를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그만 세상을 뜹니다. 문종임금 역시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임금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결국은 목숨까지 잃고 맙니다. 역사가들은 만약 문종임금이 장수했다면 세종임금님에 버금가는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에 가설이란 헛된 생각일 뿐이지만 세종임금님이 세우고 문종임금이 이어나갔을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번 떠올려 봅니다.




경회루

경회루.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이곳은 경회루입니다. 조선의 누각 중에서 가장 큰 곳이죠. 경회루는 과거에는 훨씬 화려했다고 합니다. 돌기둥마다 꿈틀대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270여년이 지난 고종임금님 때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그때 화재로부터 경회루를 지켜 달라는 의미로 청동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1997년 경회루 연못 공사때 물을 모두 뺐더니 실제로 청동용이 나왔습니다. 발견된 용은 현재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기둥 이곳저곳에 패인 부분이 보입니다. 한국전쟁 때 총탄의 흔적입니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양편에는 쇠를 먹어 버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불가사리가 앉아 있는데 한 녀석의 코가 훼손되었군요. 경회루로 날아드는 폭탄 파편을 이 녀석이 몸을 던져 막아낸 것은 아닐까요? 이곳에서는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많이 열렸답니다. 중국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기도 했고, 경회루 앞에서는 활쏘기 대회나 무과시험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요. 수면위에 비친 경회루의 모습을 한 번 보시지요.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한 날 경회루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답니다.




소주방

소주방.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gogungList.do?gungNum=1&pageNo=2_1_3_0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이 노래 기억하시나요?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였죠? '대장금'의 중요한 무대 중의 하나였던 곳이 바로 소주방입니다. 임금님의 수라상과 잔칫상을 준비하던 곳이죠. 내소주방은 왕을 위한 수라, 외소주방은 잔치와 제사 음식, 생과방이라고도 불린 생물방은 다과와 음료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소주방은 대비의 거처였던 자경전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주방은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곧 다시 소주방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문화재청이 지난 2011년부터 소주방 복원공사를 시작했답니다. 소주방 복원은 경복궁 2차 복원사업의 첫 사업입니다. 총 6단계로 진행되는데, 그 중 소주방 복원이 포함된 궁중생활권역 56개동이 1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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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정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