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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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솔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4일 (화) 23: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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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나혜석이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약 21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1932년 12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삼천리에 연재한 산문이다.

구미시찰기는 여행 경로를 따라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동 수단과 여행지, 여행일자 및 시간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한눈에 여행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구미시찰기에는 식민지 종주국 측이 구축한 시스템과 그들이 제공하는 혜택과 배려 속에서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로서의 나혜석의 모습이 있고, 서구의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을 표출하고 잇는 '여성해방론자'이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나혜석이 투영되어 있다.

21개월간의 세계일주는 나혜석의 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원문

구미(歐美) 시찰기 -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가)

내가 여기 쓰는 것은 불란서(佛蘭西)이의 한 가정을 소개하랴고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몸담어 잇는 집의 생활 상태를 보고 늦긴대로 쓰겠습니다.파리안의 소약국 민족을 위하여 세운 인권옹호회(人海會)가 잇습니다. 이 회에서 매년 일차혹은 림시로 각국대표자가 모여 소약국민을위하여 회를 엽니다.

작년십이월에도 백이의(義)수부 「라밀」에서 개최되엇습니다 즉 「촬네」씨는 이 회의 부회장이오 이 삼 개소 고등중학교 철학교수요 유명한저작가입니다 일본에는 세 번이나 갓다왓고 중국 조전도 잘 압니다. 더욱히 삼일운동 때에 여러 가지 사건을 목격한 후 조선에 만흔 리해를 갓는친구가 되엇습니다 일전에는 씨는 어느 사람에게 광화문을 헐엇다는 말을듯고 대분개하야 기사를 썻다 합니다 조선 일본의 기행문 쓴 책이 학교교과서로 쓸만치 유명합니다.

이집설비

이집은 파리 「상나잘 정류장에서 전차로 이십오분간 밧게 아니 걸리는파리 갓가운 시외니오 별장 만키로 유명한 「러베지네」라고 하는 곳에 잇습니다 시외니만치 수목이 만코 이집 정원도 왜 넓습니다 정원에는 놉흔 고목이 군데군데 서잇고 푸른 잔띄우에는 백색초화가 피여잇고 욱오러진 수풀엉겨올르는 덩굴 작약화(藥也, 월개화 등 이 피어잇고 그 여패는 채소밧이 잇서 딸기, 감저, 상추, 파, 콩이 심겨잇습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특기, 비둑이, 밀봉을 길릅니다 그리하야 끗 썩거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뜨더 반찬하고 가축잡아 고히로 씁니다 이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잇습니까

집은 조그마합니다 마는 집에 들어서면 주인이 세계일주하면서 사다가노은 각국 물산 업는것이 업습니다 중국 것 조선 것 일본 것 그 외 인도 영국것을 벽에 걸어노코 장속에 늘어노코 탁자우에 언저 노앗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문 하나만 열면 식당입니다 거기를 거처서 들어서면 주인의 서재 겸 응접실로 쓰는 비교적 넓은 방이 잇습니다 위선 눈에 번쩍 때우는 화덕 위 거울주위를 꾸민 중국 물산, 무덕, 수복, 래사(武德, 福, 來沙)이라는 글자가 때우고 방 주위에는 고문전(古文典)을 위시하야 백화전(白話傳) 남의 작물(物) 자기의 작물로 꼭꼭 찻습니다.

(『東亞日報, 1930. 3. 28)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나)

그러고 책상우에는 편지가 산가티 싸혔습니다 이 집 아이들은 각국우표모는 것이 금년래로 이천장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너의 아버지에게서 어든것이냐고 물은즉 그러타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 사람이 사교계에 얼마만한 지위에 잇는지를 알겠습니다 돌오 나와서 식당을 거처 정문 마즌편으로 주방이 잇습니다 이층에는 부부 공동침실 목욕방 화장실이 잇고 삼층에는 두 딸의 방, 팔세된 남아의 방이 따로 따로 잇습니다 그러고 주인부부의방은 그럴듯하게 점쟌케 차려잇고 딸의 방은 산뜻하게 차려잇고 소아의 방은 벽색 의자 의장 등이 모다 홍색원색을 썻다 색채교육을 암시하고 그외 동요 동화 잡지 완구물로 잔뜩 늘어노아 잇습니다 여기서 혼자 자고 자기 것은 제가 다 합니다.

가벌(家閥)과 식구

불란서 가벌이 어찌되엇는지 상식을 엇지못하야 확실히 모르겟스나 이 집은 볼래 리은(第二都會)에서 잇다가 쌀네씨와 부인부터 「빠리지아」(巴里出生人)이라 합니다 식구는 부부, 세 아들, 두 딸인데 성년된아들들은 방금영국가서 해항회사와 전기회사에 사원으로 잇으며 이 집에는 본식구 오인과 객으로 나하나 뿐이다.

가정의 구성

이 집뿐아니라 여러사람의 말하는 것을 종합하며 구라파 각국의 가정으로 보면 례외도 잇겟지만 일반으로는 량친과 미성년자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잇다 그리하야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가정임으로 별로 의사가 충돌될까닭이 업습니다.

남녀간에 성년이 되면 자기의사를 당당히 주창하고 또 남자는 돈 벌 줄 알며 녀자도 될 수 잇으면 자립적으로 살아가며 그러치 못하고 부모의 보호를 밧는다 하드라도 과히 간섭지 안는 것이 례입니다 이집 장녀도 이십세된 청년인데 사교계든지 접빈하는 태도가 십팔세된 아오와 판이하며 또 량친은 단련을 시킵니다 그러고 자리주의 주창을 당당히 세웁니다.

(東亞日報』, 1930. 3. 29)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른가(다)

주부의 권위

어느 나라든지 중류 상류의 점잔은 집은 남자가 내정에 간섭지 안는 것이 보통이 아닙니까 이집에도 내정에 관한 일에는 절대로 주부의 권위가 잇습니다 아이들을 어머니가 무지즈면 뒤에서 아버지가 말리는 것은 동서양이 갓습니다 그러나 결코 무식하게 말리는 것이 아니라 가티 아이를 꾸지저 가면서도 말리는 것입니다 이 집 부인은 열렬한 녀권주창자(女權主唱家로 또 잡지에 기고하는이만치 늘 독서를 합니다 매우 점쟌코도 다정스러운 녀자입니다 날마다 하는 일은 아츰에 일어나서 가축(家畜)에게 밥주기와 편물 재봉 독서 사교입니다 자식을 만히 나서 길르고 살림살이를 오래한이만치 역시 간혹 보통 이상감상적인 때도 업지아니하야 잇습니다 이것은 동서양 녀자를 물론하고 사람의 진을 빼는 살림살이를 격근 녀성에게는 면치못할 사실일가 합니다.

부부생활

이 집 주인은 오십 여세나 되엇으나 아즉도 건강하고 부인은 사십오륙세되엇스나 다산한이만치 낡엇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이는 어찌나 조흔지객창생활을 하는 자로는 볼 수 업슬만 합니다 부부생활에는 삼시기(三時期가 잇답니다 청년기에는 정으로 살고 중년기에는 례로 살고 로년기에는 의로 산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벌서 의로 지낼 시긔 엇마는 정으로 삽니다. 남편은 늘 부인의 상을 엿보아 깃브게 말해주고 걸핏하면 입마추기 단둘이레스도랑(식당)에 가기며 연극장에 가시 지방연설 하러가는데 동반하야가기 초대 바더 가기 일시라도 떨어져지내는 일이 업습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따로 둡니다 석반 후에는 다 각각 밤인사를 마추고 방으로 올라가고 부부 단 둘이 서재실에서 남편은 신문을 읽어들리고 부인은 그 녀페 안저 편물을 하고 잇습니다 그러고 종일 한 것과 다음날 지낼 것을 상의합니다 그러고 또 자기 방으로 둘이 자랴 들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잇습니다 구라파 각국인의 생활은 전혀 성적(性的)생활이라고 볼수 잇습니다 더구나 파리가튼 세계적 화려한 도시 가튼 곳은 오래의 자극과 유혹이 만흡니다 이런 사람들의 리면을 보면 별별 비밀이 다 잇겟지만 하여간 일부일부주의 더구나 부부란 서로 사랑하고 앗긴다는 의미가 확실히 나타납니다. 아모래도 자유스러운 곳에 참사랑이 잇는 듯 십습니다. 이들인들간혹 언쟁하는 것쯤은 업스릿가마는 하여간 전체로 보아 얼마나자미잇는지 몰르겠습니다.

(『東亞日報』, 1930. 3. 31)

니다 이집 하녀도 그런 곳에 아이를 맛기고 와서 한 시간에 삼십 전씩 밧고 종일 쉴 새 업시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오후 일곱 시만 되면 뒤도 아니 돌아보고 자전차를 잡아타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東亞日報』, 1930. 4. 1)

하남(下男)

정원(庭園)을 거두고 늘 쓸고 채소 각구는 하남이 잇습니다. 이 하남은 두 주일만에 한번씩 와서 일합니다 변치 찡찡히 난 날에도 채소를 쑥쑥뽑어 모종을 냅니다 저것이 살가 하고 며츨 두고 보면 념려업시 파릇파릇하게 살아갑니다 암만해도 무슨 비결이 잇고 전문상식이 잇는 것 갓습니다. 물론 외모는 조선의 하남처럼 너절해 보입니다.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른가 (바)

세탁과 의복

이 집뿐 아니라 일반 가정의 규측상 월요일에는 빨래를 합니다 (혹 토요일에 하는 집도 잇다고 하지만) 이 집에는 매우 경편한 세탁기구가 잇서서너코 돌르기만 하면 제절로 때가 빠지게 되엇습니다 이것을 주의해 보든 중 사가지고 가고 십흐나 넘우 커서 어쩔지 몰습니다 의복을 빨아서 말려가지고 풀을 도모지 하지 안습니다 물만 뿜어 가지고싼싼하고도 푸군푸군한 널판 우에다가 노코 다림이를 련방 가라가며 혼자 눌러 다립니다 구라파에 와서 더구나 가정에 들어와 보니 조선의 급선무로 개량할 것은 의식주(衣食住)입니다 그러타고 전부 양식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좀 귀를 펴고 살도록 여유를 맨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실행하랴면 녀자가 불응하고 녀자가 실행하랴면 남자가 불응하고 또 남녀가 합의되면 사회제도에 눌리고 실로 생각하면 까마득합니다.

방식은 다르나 인정은 갓다

방식은 다르나 인정은 갓다 남의 가정의 내정을 말하는 것이 실례일는지 모릅니다 또 그들이 알면 노할지 모릅니다 더구나 단시일에 가정이라고는 이 집 밧게 몰으니까 더 쓰지 안켓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불란서 가정의 생활방식이 다 이러타고는 단언하지못힙니다 그 직업과 취미에 딸하서 그 가풍과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내가 본것으로는 일반가성이 질서잇게 규례가 꼭꼭 째인 것은 사실일가 합니다 살어가는 방식이야 우리와 다르지만 인정이야 다를것이 업습니다 남자는 역시 남자요주부는 역시 주부며 녀아는 녀아 소아는 소아 동서양 인정이 다를것이 업습니다 노할 때 노하고 깃버할 때 깃버하는 것이 조금도 다름 업습니다.

내가 본 각 가정의 비교

나는 지금까지 조선가정은 내가 경험해본 바요 그외 일본가정은 한울안에서 살어보고 중국가정을 종종 구경하고 로국인 가정도 좀 넘겨다 보앗고 독일가정에서 이삼주일 지내보고 그러고는 불란서 가정입니다 미국에 영국 가정 미국가정을 비교해보고 그 배면에 잇는 사회를 보면 사회가 더 진보된 곳에는 가정이 더 규례가 깨워잇고 가정이 문란한 사회는 또한 들 진보된 것을 보앗습니다 그러고 보니 승거운 말슴가트나 개인과 가정과 그 사회는 서로 참연적 단계를 가지고 잇습니다 그리하야 개인이 긴장해 있으면 일가정이 질서가 있고 일가정이 규례가 깨면 그 사회가 진보해 잇습니다 다시 사회측으로부터 생각해보면 문명이 극도에 달하고 보면 가정이 부득이 규례가 깨워지고 일개인이 부득이 자기 살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가정이 지금 내가 잇는 불란서 가정이라하면 우리는 장차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야 사회에 도착해야 하겠으니 얼마나 한 차이가 잇습니까 조선에도 전문지식을 가진 녀성으로 가정에 전력할 뿐만 아니라 당당한 주의 주장으로 실행하는 것은 가히 존경할만 한 사실입니다.

巴里市外 센느강下流에서 (『東亞日報』, 1930. 4. 2)


구미(歐美) 시찰기


1. 안동 현에는 조선인의 학교와 금융 기관도 잇다


류월 십구일 열한시. 봉천 행으로 부산을 출발하앗습니다. 어느듯 기차는 북을 바라보고 굴러갑니다. 때는 경북도(慶北道에 한발이 심할 때라 전답에는 몬지가 일고 도모지 비 올 가망이 업스며 차스속의 선풍기가 약간의 바람을 일을 뿐이오, 산야의 수목은 뜨거운 볏 알애에 숨이 막혀 하는 것 가탓습니다.

안동(安東)에서 오일 간 대구와 경성서 잠간 거처서 이십 삼일 아침에 곽산(郭山) 역에서 사매 지석(芝錫)이 승차하자 다시 남시(南市) 역에서 다시 남행 열차로 가게 되엇습니다. 남시까지 안동 조선인회 대표 한 사람의 출영이 잇섯고 신의주에서 안동 조선인 회장과 우리 집에 잇는 학생이 승차하얏습니다. 오전 열한 시에 안동 역에 도착하니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팔십 여 명의 출영이 잇서 모다 손이 으슬어저라 하고 붓잡어 흔들며 진정으로 반기어 주었습니다. 려관은 안동 호텔로 정하얏습니다.

안동은 괴왕 육 개년 간 재근하는 곳이라 눈에 찌우는 이상한 것은 업섯스나 좀체 다시 못 올 줄 알앗든 곳이 구 개월만에 오게 되니 길가에섯는 보드나무까지 반가웠습니다. 중국 인력거꾼은 아즉도 나의 얼굴을 닛지 안코 벌떼가티 안력거를 몰고 달려들엇습니다. 실로 안동현과 우리와는 인연이 깁흔 곳입니다. 소위 관리생활로 드러선 초보가 여기요, 사회상으로 사업이라고 해본 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아본 데도 여기입니다. 인심에 대한 쓴맛 단맛을 처음으로 맛보아 온 곳이 여기입니다. 사교상에 좀 익숙해진 것도 이곳이며 성격상으로 악화해진 것도 이곳입니다.

재만동포의 경제적 발전은 오직 금융기관에 있다는 안동의 조선인 금융회가 설립한 후 이래 안동에 사는 조선인 금융회의 중심기관이 되어 잇서 그 전도가 유망하게 우리 눈에 보일 때에 어찌 아니 깃브겠습니까.

총독부와 만철에 다니며 교섭한 결과 어느 곳에 내노아도 자랑할 만한 조선인 보통학교 건축이 생겨나 수백 여 명의 생도를 수용하는 중이며 이번에 만철 경영으로 되어 그 직원 일동이 만면 희색인 것을 볼 때 어찌 만족을 듯기지 안흘 수 잇겟습니까. 그런데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의 생활이란 일정한 주소를 가진 사람이 적습니다.

(『東亞日報』, 1930. 4. 3)


2. 아름다운 청개와에 황금기가 날린다.


그 이튿날에는 서양 가서 닙을 조선의복을 준비하얏습니다. 명색이 없는 우리 의복을 세계적으로 소개하고 싶고 화가(畵家)들의 단조해진 눈을 새롭게 하야 주고 십흔 호기심도 업지 안항습니다. 다음날에는 동숙하게 된 음악가 일행과 채목 공사 증선으로 압록강(鴨綠江에서 오전을 허비하게 되엇습니다. 찌는 마침 음력 그믐께라 조수(潮水)가 탁류되어 만강(江) 중이엇습니다. 남편 강안은 조선이오, 북편 구안(口岸)은 중국으로 된 인연 김흔압록강 상에 오래간만에 다시 뜨게 되니 감개무량하얏습니다. 이날 석반은 채목 공사 리사장 부의) 사택에서 지내게 되엇습니다. 늘 늦기는 말이지만 일본 상류계의 부인네들의 예의는 참 까다로운 것입니다. 삼년간이나 안는 법, 차 가져오는 법, 차 내는 법, 차 쌀으는 법 즉 작법(作法)과 다도(茶道를 배와 가지고 그것이 몸에 베어서 일동 일절이 법 아닌 것이 업습니다. 나는 이 법을 따라가라고 처음에는 좀 흉내를 내잇습니다마는 남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큰 어리석은 일로 생각하앗습니다. 그리하야 나는 실례되지 안는 범위 안에서 내 고집을 세워왔습니다. 이것은 오견일는지 몰으나 일본 상류계급의 부인 자리는 태반이 허위와 의식(儀式)에 얼키어 좀체 그 진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고, 압길을 서로 사양하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나가티 생긴 대로 살랴고 하는 자에게는 이런 좌석이 과히 유쾌치 못합니다.

봉천

다음날 아침에 고별인사를 마치고 열한시 삼십분에 안동을 떠나 봉천의로 향하얏습니다. 여기서 제일 맛있다는 청국 료리를 어더먹고 봉천시가를 구경하앗습니다. 봉천은 기왕 두 차례나 본 일이 있어 전에 비하면 도로가 매우 정돈되어 전차까지 놓여 잇습니다.

봉천은 실로 동삼성(東三省)의 수부인 만치 신구시가의 굉장한 건축이며, 성벽의 사대문 궁성의 황금기(黃金海)와 청기와, 각국 령사관의 기스발이 날리는 것 눈에 떼우는 것이 만핫습니다.

(『東亞日報』, 1930. 4. 4)


3. 부산서 장춘까지에 순사 복색이 가진 각색


밤 아홉시에 장춘(長春)에 도착하앗습니다. 아마도 호텔에 들어 차표를 부탁하고 그곳 정원에서 바람을 쏘이다가 남은 시간은 시가 구경으로 채윗습니다.

장춘만 해도 꽤 서양냄새가 납니다. 신시가(新市街)는 더 말할 것도 업거니와 중국시가도 봉천이나 안동보다는 휠신 정돈되고 깨끗합니다. 로국 사람이 만히 드나드는이 만치 로국식으로 지은 집이 만코 로국 물품이 만흐며 로국인 구역(國城까지 잇는 곳입니다. 고무바퀴로 된 마차가 만흔데 소리 업시 날새게 굴으는 품이 중국식 덜컥덜컥 굴르는 「맘만데, 마차와는별다른 기분을 줍니다. 어쩌튼 장춘은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는 곳입니다.

밤 열한 시에야 파란 기차(이곳 기차는 전체가 푸른 비침니다)를 탓습니다.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순사의 복색이 곳을 딸흔 것을 퍽 흥미 잇게 보앗습니다. 부산서부터 신의주까지는 정거장마다 힌 정복에 밝안 테두리정모 쓴 순사가 하나씩 둘씩 번쩍이는 칼을 잡고 서서 혹시나 그들의 이르는 바 부정선인(不鮮人)이 오르내리지 안는가 해서 주의하고 잇는 것을 보앗습니다. 안동서 장춘까지는 누런 복장에 붉은 줄 두세 오리를 떼운 누런 정모를 쓴 일본 만철 지방 주임순사(滿鐵 地方 主任 巡査가 피스톨 가죽 주머니를 혁대에 매어 차고 서서 이것이 비록 중국 땅이나 기차연선(線)이 만철 관할이란 자랑과 위험2)을 보이고 잇습니다. 장춘서 만주리(滿洲里)까지는 검은 빗 나는 회색 무명을 군데군데 누벼 복장으로 입고 엇깨에다는 삼등 군졸의 별표를 부치고 회색 정모를 비스듬이 쓰고 칼을 질질 끌리게 차고 곳 가슴이라도 찌를 듯이 창검을 빼들고 멍하니 휴식하고 서 잇는 중국 보병이 기차가 도착할 때와 떠날 때에는 두 발을 꼭모아 괴착을 합니다. 아마 이것은 몽고(蒙古)로 침입(侵入)하랴는 마적(馬賊)을 막자는 것이겠지요 파란 기차는 이튿날 아츰 여듭 시에 「할빈(哈爾濱)에 도착하얏습니다.

(『東亞日報』, 1930. 4. 5)


4. 사람의 머리 통만한 돌들이 깔려 있다.


합이빈(哈爾)

합이빈은 북으로 로서아와 구라파 각국을 통하야 세계적 교통로(交通路)가 되어 잇고 남으로 장춘과 련하야 남만주 철도와 련락된 곳으로 세계인의 출입이 흔치지 안코 로국 혁명 이후 구파, 즉 백군(軍)파가 망명되어 이리로 다수 집합하게 되엇습니다. 당시는 세계적 음악가, 미술가 그 외각 기술가가 만히 모여들어 처처에서 조흔 구경을 할 수 잇섯든 것은 내가 본 사실입니다. 과연 합이빈은 시가가 충성하고 인물이 번화한 곳입니다. 그러나 도로에 사람의 머리통 만큼씩한 돌이 깔려 굽 놉흔 구두로 걸을랴면 부라질 하기에 매우 힘듬니다. 시가는 아즉 정돈 못 되고 비교적 더러웁니다. 이 칠월은 극히 더운 때라 돌발적으로 검은 구름이 한울을 더프면 대륙적 소낙비가 맹렬히 쏘다집니다. 곳 털외투라도 닙을 만치 선선하야지다가 삽시간에 변이 쨍쨍하게 나고는 다시 폭폭 찝니다. 오후 네 시쯤 나가보면 형형색색으로 된 모자와 살이 비치는 옷을 닙은 미인들이 길이 메이게 지내갑니다. 처음 볼 때에는 넘우 혼란해서 눈이 압하집니다.

부녀생활과 오락기관

어느 곳을 물론하고 빈부의 차등이 잇는 동시 그 생활을 어찌 일치하게 볼수 잇겟습니까. 다만 내가 본 하얼빈 부녀의 생활의 일부분을 쓰고 저 합니다. 아츰 아홉 시쯤 해서 일어나서 식구 일동이 쌩 한 조각과 차한 잔으로 조반을 먹습니다. 주부는 곳 광주리를 녀페 끼고 시장으로 갑니다. 점심과 저녁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 가지고 와서 곳 점심준비를 합니다. 대개는 우육을 만히 써서 우리 나라 곰국가티 고기를 속에 너코 이삼 시간씩 곱니다. 그리하야 열두 시로 오후 두 시까지 식탁에 모여 안저한담으로 진탕 점심을 먹습니다. 이 시간에는 각 상점에도 철문으로 꼭꼭 닷습니다. 그리하야 이 동안은 시가에는 인적이 단절해집니다. 그러고 주부는 가사를 정돈해 노코 낫잠을 한숨 잡니다. 오후 일곱 시로 여덜 시까지 저녁밥을 대개 점심에 남것든 것으로 지내고 나서는 화장을 하고 아홉 시부터 외출하야 활동사진관, 극장, 무도장으로 가서 놀다가 새벽 오륙시에나 돌아옵니다. 부녀의 의복은 대개 상점에 만히 해 거러 논 중에서 맛는 대로 사 닙고 동절에는 오즉 하절 의복에 외투만 닙으면 고만입니다. 이것을 볼 때 녀름이면 다림질로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부인이 불상하게 생각하지 안흘 수 업섯습니다.

(『東亞日報』, 1930. 4. 6)


5. 참을성 만은 독일사람 과학 냄새 도는 백림시가


독일

독일은 과학과 음악뿐 아니라 문학도 불란서와 아플 다토며 그 나라 사람은 질소하고 참을성이 만코 회복성(回復性)이 왕성하다고 합니다. 독일의수부 백림(林)에는 물론 전차, 써스 지하차(地下車)가 쓴힘업시 오고가고하야 대도회지의 기분이 농후하앗습니다. 길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우는 것이 불란서 파리(巴里)에서 보든 순사가 방맹이로 통행지도를 하는 것이 베를린 도로 네 거리에서는 반드시 가공(架空)에나 지상에 전기 등을 해다러노코 붉은 불이 나스면 진행하고 푸른 불아 나스면 정지하야 매우 경편하고 바라보기에도 경쾌하얏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과학냄새가 나고 더욱이 일본서 독일 제도를 만히 배워간 것을 잘 알 수 잇섯습니다.

또 한 가지 우스운 말을 들을 수 잇습니다. 베를린에 살찐 녀자가 만흔것은 그들은 삐-루를 마시는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구라파 각국에서는 섯달 그믐날 밤이 참 찬란합니다. 일년 중 마지막 가는 날이라 하야 크게 기념하는 것입니다. 식탁에는 마침 성찬을 차려 노코늘어 안젓다가 밤 열두 시를 치면 축배를 난후는 동시에 각 식당으로서는종소리가 나고 류리창으로는 색조히를 내던저 이 집 창에서 저 집 창까지걸치도록 합니다. 그러고 아모에게 대해서든지 서로 신년 축하 인사를 합니다. 그리한 뒤에 모다 길가로 나가서 춤추는 집에서 춤추는 자 먹는 자이상한 모자와 의복으로 차리고 길거리에 나서서 술 주정하는 남자 허리가 부러질 듯이 쌀쌀 웃는 녀자들이며 남자가 녀자를 쪼차다니며(이날 밤은 경관의 임의가 업단다) 입마치랴면 녀자는 꼬챙이로 찔르는 소리를 하며 쫒겨 다라나는 광경, 대 혼잡을 일습니다. 도로에는 사람이 빽빽하게왕래하며 길바닥은 가진 색조히 가루가 발에 채웁니다. 이러케 이날 밤을길가에서 새우는 것이 서양 각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