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필 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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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민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1월 30일 (수) 23: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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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정의

김정희 필 침계는 분당지에 예서(隸書)로 쓰고 비단으로 장황(粧䌙)한 횡피(橫披)의 형태이다. 화면 오른쪽으로 치우쳐 ‘침계(梣溪)’ 두 글자를 쓰고, 왼쪽에는 8행에 행마다 9~12자씩 모두 86자의 발문을 행서로 썼으며, 두 방의 백문인(白文印)을 찍는 등 격식을 완전하게 갖춘 작품이다. 침계(梣溪)는 김정희의 친구 윤정현(尹定鉉)의 호(號)이다.

의미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의 필법을 혼합해서 쓴‘침계’는 김정희의 자유분방한 개성이 돋보이는 파체(破體)의 대표작이다. 구성과 필법에서의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김정희의 학문ㆍ예술ㆍ인품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 해설
  1. 해서 (楷書) / 한자 서체의 하나, 예서에서 변한 것으로 똑똑히 정자(正字)로 쓴다. 중국 후한의 왕차중(王次仲)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2. 윤정현 (尹定鉉) /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황해도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련전시

  1. 간송특별전
  2. 새보물납시었네 신국보 보물전
  3. 난죽대전
  4. 사군자대전

추사 김정희

소개

조선후기 금석학파를 성립,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자 서화가.

일생

경주 김문에서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대를이었다. 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 참의 등의 직책을 지냈다. 생부가 유배를 떠나게 되어 배후 의심을 받아 함께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었다. 1834년 현종 즉위 이후,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현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 이후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제자

  • 조희룡
  1. 김정희의 제자 조희룡은 비록 중인 출신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선비 중의 선비'였다고 한다. 그는 사군자 중에 매화와 난초를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매화의 신비로움을 담아 작품으로 남긴 것이 바로 <매화서옥도>, <홍매대련> 등의 매화 걸작이다.
  2. 김정희는 제자가 그린 걸작들이 너무 아름답고 뛰어나 기꺼워하진 않았다.

기타 작품

김정희의 작품

작품 목록
작품 설명
김정희 필 난맹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묵란화(墨蘭畵) 16점과 글씨 7점을 수록한 서화첩, 김정희의 전담 장황사(粧䌙師) 유명훈(劉命勳)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 글씨 뿐 아니라 사군자에도 능했던 김정희는 관련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난맹첩처럼 묵란만 모은 사례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 추사 김정희가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의 『서결ㆍ전편』의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을 행서로 쓴 것.

기타

작성자: 김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