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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 13:55 기준 최신판


소개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 선조 시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 이순신이 1592년 ~ 1598년(임란 7년)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를 말한다. 정확히는 1592년(선조 25년) 정월(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선조 31년) 11월 17일(양력 1598년 12월 14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충무공 이순신의 일기이다. 현재까지도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일기의 초고본 8권 중 7권이 남아서 충남 현충사에 비치되어 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란 '전란 중에 쓴 일기'라는 뜻으로 원래 이순신이 작성한 초본에는 난중일기가 아니라 해당 년도의 이름으로 임진일기, 을미일기 등의 제목이 붙어있었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이순신이 사망하고 200년이 지난 조선 제22대 왕, 정조 때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집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내용

난중일기에는 일기가 쓰여진 당일의 기상 변화, 군무 내용, 진중의 군정 등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의 본가에 대한 걱정 및 자식과 아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평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류성룡에 대한 걱정 등 이순신의 개인적인 정서도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일지는 일기 형식으로 요점만 간략하게 적은 내용이다. 별일 없었던 날에는 단순히 날씨만 기재되어 있는 날도 있다. 그래서 번역된 난중일기를 보면 넘어가는 날도 존재한다. 이순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적어 놓은 부분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정유년(1597년)의 일기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두드러지게 작성되어 있다.

원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의 첫 일기' 
初一日壬戌。 晴。 曉。 舍弟汝弼及姪子菶, 豚薈來話。 但離天只。 再過南中。 不勝懷恨之至。 兵使軍官李敬信。 來納兵使簡及歲物, 長片箭雜物。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 이순신은 일기에서 시종일관 어머니를 天只(천지)라고 칭하고 있다.]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마 절도사의 편지와 설날 선물, 장전(長箭)[* 긴 화살]과 편전(片箭)[* 일명 애기살. 덧살로 쏨]과 그외 여러가지 잡물을 바쳤다.
 1592년 1월 16일 일기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16일 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관아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장형에 처했다. 우후(虞候)와 가수(假守)들 또한 점검하고 경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헛되이 제 한 몸 살찌우기만 일삼고 이리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도 알 만한 것이리라. 성 밑의 토박이 병사인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先生院) 쇄석에 쓸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 강아지에 해를 끼친 고로 장형 80대에 처했다.
 1592년 2월 4일 일기 
初四日乙未。 晴。 出東軒公事後。 上北峯築煙臺處。 築處甚善。 萬無頹落之理。 李鳳壽之勤事。 可知矣。 終日觀望。 當夕下來。 廵視垓坑。
초4일 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후에 북봉의 연대(煙臺) 지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은 곳이 너무 훌륭해서 무너질 리가 만무했다. 이봉수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1592년 2월 19일 일기 
十九日庚戌。 晴。 發廵到白也串監牧官處。 則昇平府伯率其弟來待。 妓生亦來。 雨後山花爛開。 景物之勝。 難可形言。 暮到梨木龜尾。 乘船到呂島。 則瀛洲倅與呂島權管出迎。 防備點閱。 興陽以其明日行祭先行。
19일 경술. 맑음.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승평 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데려왔다. 비 온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훌륭한 경치를 가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 이목구미에 이른 뒤 배를 타고 여도에 가니 영주 현관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명일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먼저 갔다.
 1592년 4월 15일 일기. (임진왜란 발발 및 전황이 이순신에게 최초로 고지됨.)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15일 갑진. 맑음. 국기일(國忌日)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사(巡使)[9]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고친 뒤 즉시 역자(驛子)[10]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일몰 때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문을 보니 왜선 구십 여척이 나와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온 수사(水使)의 관문(關文)[11]을 보니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로 즉각 장계를 써서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영남 방백의 관문 역시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야 일기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招集諸將約束曰。兵法云。必死則生。必生則死。又曰。一夫當逕。足懼千夫。今我之謂矣。爾各諸將。勿以生爲心。小有違令。卽當軍律。再三嚴約。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소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제장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며 말하였다.
"병법에 이르길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 하면 죽는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제장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두세 번을 엄히 약속하였다.
이 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리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리하면 패할 것이니라." 하셨다.
 1598년 10월 17일 마지막 일기 
十七日。昨日。伏兵將鉢浦萬戶蘇季男,唐津浦萬戶趙孝悅等。倭中船一隻。滿載軍粮。自南海渡海之際。追逐於閑山前洋。則倭賊依岸登陸而走。所捕倭船及軍粮。被奪於唐人。空手來告。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관련 자료

사진 자료

작성자 및 기여자

디지털과 지식콘텐츠(2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작성자 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