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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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18일 (금) 13:30 판 (역사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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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서울특별시의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한국전쟁과 연관이 깊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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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입구역에서 가는 법

한성대입구역 1번 출구 -> 삼선교.한성대학교.조소앙활동터 정류장에서 109번 버스 승차 -> 미아리고개.미아리예술극장 하차 후 도보 3분

이름의 유래

미아리고개라 불리게 된 이유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미아동의 동명이 생겨났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기 때문이다. 
혹은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되놈이 넘어온 고개라고 하여 되넘이고개(돈암현)로 불리기도 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오랑캐가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해서 적유령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여진족이 한성의 부녀자를 붙잡아 이곳을 통해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개

역사적 이야기

  • 6.25 전쟁과 미아리고개
<요약>
미아리 고개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큰 고개였고,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턱이 되는 고개였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 되었고 그곳에서 북한군과 한국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애국지사들이 포로가 되어 줄줄이 이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갔다.
<전개 과정>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의 모든 전신이 무너지고, 분계선으로부터 45km에 불과한 서울은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 1950년 6월 27일 오전 7시: 광주 및 전주 등에 주둔 중인 제5사단은 야간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에 도착한다. 총참모장 채병던 소장은 사단장에게 미아리고개로 진격하여 서울을 방어하라고 지시한다.
- 1950년 6월 27일 오후 4시: 제5사단 이응준 소장과 제7사단 유재홍 준장은 미아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대비한다.
-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 북한군은 20여 대의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우고 미아리 방어선에 접근하지만, 국군 제5사단 20연대 1대대의 방어로 진격이 저지된다.
- 1950년 6월 27일 오후 8시: 아군 지휘관들은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와 칠흑같은 어둠에 적군이 야간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 1950년 6월 27일 밤 12시: 북한군 제4사단은 다시 미아리 방어선을 공격하여, 28일 새벽 1시에 미아리고개 방어선이 뚫린다.
- 1950년 6월 28일 오전 6시: 북한은 삼선교 일대를 점령한 뒤 퇴각하는 국군을 공격한다. 이후 서울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고, 정치인·교육자·의사·중앙부처의 직원 등 약 1,500명이 구속·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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