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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 (일) 22:55 판


개요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자 소리꾼. 중요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다.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3남 2녀중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송만갑과 그 제자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그녀가 주장한 예술적인 기반 자체가 동편제였기 때문에 계보상으로 동편제 명창에 속하며, 20세기에 들어서 송만갑제 판소리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64년에 처음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될 때 남긴 녹음 자료에도 송만갑제의 더늠을 중심으로 하는 대목을 맡아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만갑이나 김정문 이외에도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에게서도 소리를 배우는 등 사승 자체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가리지 않고 배웠으며, 동편제 흥보가를 부르면서도 제비노정기만큼은 서편제인 김창환의 소릿제로 부르고 있는 등, 동 시대 여러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유파를 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다만 송만갑이나 정정렬 이외에도 동편제 명창인 박기홍, 유성준에게서도 배웠던 만큼 동편제의 소리 지향에 가까운 소릿제를 부르긴 하였다.
23세인 1928년부터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성악연구회에도 참여하여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등 창극의 여주인공으로 자주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44세가 되던 1948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당시 창극 활동을 했던 여성 명창의 처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국극의 연출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사생활은 매우 불행했는데 알콜 중독과 노름꾼인 아버지 박재보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소리를 배우러 다닌, 딸 박녹주가 그렇게 배운 소리로 푼돈이라도 벌면 모두 가로채갔으며, 박녹주가 14세가 되었을때 200원을 받고 그녀를 기생으로 팔아넘기고 그녀가 소리꾼으로 대성한 이후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친부라는 이유로 1937년에 사망할때까지 그녀를 끈질기게 착취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박녹주는 신세를 비관해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다. 박녹주는 유약한 성품 탓에 차마 아버지와 의절하지 못했단다. 특히 박녹주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아버지를 증오하며 그를 부모 취급도 하지 않고 돈도 주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만만한 박녹주에게 가서 갈취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박녹주는 1948년에 눈병을 앓아 한쪽눈의 시력을 잃었고 해방 이전부터 접했던 아편 중독 증세로 인해 병고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과 결혼했다. 결혼 이전부터 김종익과 교류를 했었으며 김종익은 이 인연으로 국악계에도 지원을 많이 하였다. 김종익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다.
1960년대부터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던 바탕소리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63년 기독교방송에서 춘향가를 녹음하고, 1972년 자택에서 기록보존용으로 심청가를 녹음하였다. 흥부가는 총 4차례나 전판을 녹음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7년 녹음(고수 : 정권진)과 1973년 녹음(고수 : 김동준)은 음반화 되었다. 전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출반되었으며, 이후 CD로도 복각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문화재보호협회 소장 녹음으로 여러 차례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CD로는 제작되지 않아 지금은 듣기 어렵다. 그 외에 출반되지 않은 녹음으로는 1976년 문예진흥원 판소리 조사 사업 당시에 녹음한 것(고수 미상)과 녹음 시기 미상의 기독교 방송 소장의 녹음(고수 : 정철호)이 있다.
제자로는 박송희, 조순애, 장영찬,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이일주, 조상현, 이옥천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박송희와 한농선이 그의 뒤를 이어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은 중요무형문화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로, 이일주, 이옥천 등은 각기 시도지정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굵직한 명창들을 길러냈다.
이처럼 판소리, 그 가운데에도 흥부가 전승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자 당대의 슈퍼스타였는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김유정의 스토킹 상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시대가 시대였고 김유정이 훗날 소설가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한동안 짝사랑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 김유정의 행동거지는 악질 스토커의 그것이었다. 김유정은 박녹주가 자신의 마음을 안 받아준단 이유로 그녀에게 혈서를 보내는가 하면, 박녹주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노려 사람을 납치하려고도 들었다.[6] 그러다 보니 박녹주는 김유정이라면 질색을 했다. 특히 김유정 때문에 박녹주가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가 한 행동은 사랑을 핑계로 극심한 민폐를 끼쳤을 뿐이다. 그래도 결국 김유정에게 동정심이 없진 않았는지, 김유정의 친구인 안회남이 김유정이 죽고 난 뒤 오히려 자신더러 김유정을 죽인 살인자라며 매도하는데, 그때 손 한 번 잡아주기만 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동정했다고 한다. 스토커에 시달리다 못해 그의 친구마저 되려 자신을 매도하려 했음에도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대인배다. 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 1970년대만 하더라도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판사가 앞장서 결혼시키는 시대 분위기가 있었던 만큼, 안회남의 매도에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동정을 보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일수도 있다.

연보

1905년: 2월 15일 박수무당 박재보(朴在甫)의 3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1916년: 동편제 판소리 대가 박기홍(朴基洪)에게서 춘향가와 단가를 배웠다.

1918년: 김창환(金昌煥)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웠다.

1921년: 원산(元山)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와 혼인하였다.

1922년: 상경해 한남권번(漢南券番)에 기적(妓籍)을 두고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서 단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1924년: 콜럼비아사 초청으로 첫 음반 취입.

1928년: 콜럼비아사 전속 계약 체결. 3월 25일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주최 신춘남녀명창대회 참가.

1929년: 1월 12일 조선음악협회 주최 경인연합명창음악연주회 참가.

1930년: 9월 15일 팔도명창대회 참가.

1931년: 제2회 팔도명창대회 참가.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제2회 공연 출연. 조선음률협회 주최 삼인공연음악회 때 박월정·김초향과 함께 출연하여 단가·춘향전 등을 공연했으며, 조선음률협회 주최 박월정 여사 고향방문음악회 출연.

1932년:「조선음악의 밤」 때 출연.

1934년: 5월 11일 조선음악연구회(朝鮮音樂研究會)의 발기총회 때 그녀는 이동백·강태홍·김동강·김용승·김종기·김창룡·김채련·송만갑·심상건·오태석·정정렬·한성준, 이상의 발기인과 함께 참여하여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창극좌(唱劇座)가 창단됐을 때 강태홍·김세준·김연수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 1936년 4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창립기념공연으로 동양극장의 무대에 올린 창극 흥보전 공연 때 흥보처 역을 맡은 그녀는 오태석(흥보)·정남희(놀보)·임소향(놀보처)·조상선(마당쇠) 등과 함께 출연.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고,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당선.

1948년: 9월 1일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가 출범했을 때 회장을 맡은 그녀는 부회장은 김연수와 임유앵, 총무는 조유색, 그리고 단원은 박귀희·김소희·한영숙·김농주·성추월·신숙과 함께 그해 10월 창단공연으로 창작 창극 "옥중화"(獄中花)를 시공관에서 공연.

1950년: 여성국극단체 보랑국악단 대표를 역임.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 판소리 교사로 출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1976년: 12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보호협회가 공동 제작한 『한국의 음악』에 판소리 흥보가를 취입. 지구레코드사가 제작한 LP음반 5매의 『창극대춘향전』 취입 때 김연수·박귀희·김여란·박초월·김소희와 함께 출연. 정정렬(1876~1938)이 작창한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을 전승.

1979년: 5월 26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면목동에서 사망.


생애 관련 영상

<https://youtu.be/zsaosPwro0Ae> <https://youtu.be/rmgXHtubFbU>

대표 작품

흥보가

제비노정기

비단타령

춘향전

심청전

편시춘


출처

1. [출처:『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29~31쪽]

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녹주(朴綠珠))]]

3.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박녹주 [朴綠珠]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송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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