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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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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학당 ==
 
== 배재학당 ==
 
=== 배재학당의 등장 ===
 
=== 배재학당의 등장 ===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는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Scranton,W.B)[4]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명의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뜻에서 ‘영어학교’로 불리다가, 1886년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의 '배재영재'에서 '배재'를 따 고종황제가 직접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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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는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Scranton,W.B)[4]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명의 학생을 얻어 영어를 가르친다는 뜻에서 ‘영어학교'를 만들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말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의 '배재영재'에서 '배재'를 따‘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주 01)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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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학당의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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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이후 배재학당의 성장은 굉장히 빨랐다. 이에 대해 아펜젤러는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 버렸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라고 언급하며 배재학당의 성장 속도를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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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학당동관의 설립과 사용 ===
 
=== 배재학당동관의 설립과 사용 ===
 
배재학당동관은 배재학당이 1916년 조선총독부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무렵에 만들어졌다. 연면적 1,194.59㎡에 지하실이 있는 3층 벽돌 건물이며,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배제고등학교는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건물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배제학당동관은 2001년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배재학당동관은 배재학당이 1916년 조선총독부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무렵에 만들어졌다. 연면적 1,194.59㎡에 지하실이 있는 3층 벽돌 건물이며,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배제고등학교는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건물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배제학당동관은 2001년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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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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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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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배재학당(培材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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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오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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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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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6일 (일) 22:04 판





개요

배재학당동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약식 학교건물로서 배재학당의 교사이다.1916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처음 지어질 때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앞쪽의 현관과 양옆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매우 우수한 건물의 구조와 모습, 건물에 사용된 벽돌 구조를 자랑한다. 이 건물은 건물의 형태도 매우 우수하여 한국근대건축의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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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배재학당의 등장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는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Scranton,W.B)[4]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명의 학생을 얻어 영어를 가르친다는 뜻에서 ‘영어학교'를 만들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말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의 '배재영재'에서 '배재'를 따‘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주 01)을 내려 주었다.

배재학당의 성장

개교 이후 배재학당의 성장은 굉장히 빨랐다. 이에 대해 아펜젤러는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 버렸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라고 언급하며 배재학당의 성장 속도를 언급하였다.

배재학당동관의 설립과 사용

배재학당동관은 배재학당이 1916년 조선총독부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무렵에 만들어졌다. 연면적 1,194.59㎡에 지하실이 있는 3층 벽돌 건물이며,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배제고등학교는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건물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배제학당동관은 2001년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교육 내용

<배재사>의 내용으로 볼 때, 학제로는 문과(文科), 신과(神科), 상과(商科), 수물과(數物科), 응용화학과(應用化學科), 농과(農科)의 여섯 과로 되었는데 교직원은 18명이고 학생을 89명이었다.

졸업생

이승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배재학당(培材學堂))]

찾아오는 길

참고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