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44번째 줄: 44번째 줄:
 
[[파일:보문사배치도.jpg|700픽셀|가운데]]
 
[[파일:보문사배치도.jpg|700픽셀|가운데]]
  
다보탑多寶塔(국보 제20호)
+
==='''가람 안내'''===
 +
===='''극락보전(極樂寶殿)'''====
 +
[[파일:극락보전.jpg|700픽셀|가운데]]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
지금의 극락보전은 줄곧 대웅전으로 불려 지다가 2017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
왜 극락보전이 대웅전으로 불려 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수는 없다. 직전의 대웅전 편액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의 글씨로 극락보전 뒷편에 걸려 있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
상량문에 의하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건륭12년(1747. 조선 영조 23년) 최초 중건되었으며, 도광4년(1824. 순조 24년) 1차 중수, 동치4년(1865. 고종 2년)에 2차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보문사 극락보전은 서울 지역 불교건축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축된 불교 건축물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며 수행 정진한 도량임이 증명되었다. 특히, 상량문과 더불어 그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량복장물도 함께 발견되어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전통성을 모두 갖춘 총본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
 
 +
극락보전은 팔작지붕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존불이신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부처님께서 인도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장면을 도설화한 그림으로 동치6년(1867) 금어(金魚 - 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총책임자) 경선응석(慶船應釋) 스님이 그린 석가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8호)와 호법신장(護法神將)을 그린 신중탱화(제99호)가 봉안 되었다. 내부 불단의 구조는 뒷벽에서 약간 앞으로 나와 있어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며 참배할 수 있는 전형적인 전통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gallery>
 
<gallery>
  
파일:다보탑1.jpg|300px| |'''다보탑(by Sirén, Osvald)'''<br/>[https://www.europeana.eu/portal/en/record/91669/SMVK_OM_Bildarkiv_200416.html?q=Bulguksa#dcId=1574922641205&p=1 유로피아나],<br/>'''CC BY-NC-ND'''
+
파일:다보탑1.jpg|300px| |'''다보탑(by Sirén, Osvald)'''<br/>
 
파일:다보탑2.png|300픽셀| |'''한겨울의 불국사(by 이성환)'''<br/>[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1236756&menuNo=200018 공유마당],<br/>'''CC BY-NC-ND'''
 
파일:다보탑2.png|300픽셀| |'''한겨울의 불국사(by 이성환)'''<br/>[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1236756&menuNo=200018 공유마당],<br/>'''CC BY-NC-ND'''
 
파일:다보탑3.png|300픽셀||'''다보탑(by Tonio Vega) '''<br/>[https://www.flickr.com/photos/71368551@N00/338797326/ flickr],<br/>'''CC BY-NC'''
 
파일:다보탑3.png|300픽셀||'''다보탑(by Tonio Vega) '''<br/>[https://www.flickr.com/photos/71368551@N00/338797326/ flickr],<br/>'''CC BY-NC'''

2021년 6월 3일 (목) 17:43 판


보문사

보문사

소개

서울의 전통사찰로 등록된 보문사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국사(曇眞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특히,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가 저술한 「퇴경전서-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옛 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비구니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그 사이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다가 2017년 극락보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었다.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극락보전은 건륭12년(1747. 조선 영조 23년) 최초 중건되었으며, 도광4년(1824. 순조 24년) 1차 중수, 동치4년(1865. 고종 2년)에 2차 중수되었음이 밝혀졌다. 퇴경전서에 의하면 1826년에 수봉법총(秀峰法聰)스님이 만세루를 신축하였으며, 1827년에 정운(正雲)스님이 좌우 승당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1842년에는 영전(永典)스님이 만세루를 수리하고, 1872년에 금훈(錦勳)스님이 좌우 승당을 중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극락보전 상량문의 발견으로 보문사는 1800년대부터 줄곧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며 수행·정진하였으며, 특히 동치4년 상량문에서는 왕실발원 사찰로 조선왕조의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상량문과 더불어 그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량복장물도 함께 발견되어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전통성을 모두 갖춘 총본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輦)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 등 서울시 유형문화재,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다수의 유·무형의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동대문 밖 비구니 수행도량 보문사(普門寺)에는 조선후기부터 불리워온 별칭이 있다. 그 별칭은 '탑골승방'으로 서울의 낙산 아래 동망봉을 경계로 청룡사, 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군집해 있어 생긴 이름이다. 특히 보문사는 조선시대에 탑골 승방이라 불리는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니사(尼寺) 중 하나로, 단종의 왕비 송씨와 연관된 동망봉과 청룡사ㆍ미타사가 이웃해 있어 이 곳이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동문 밖, 비구니 도량으로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이 갈 곳 없이 방황할 때 이곳 탑골승방의 문은 활짝 열려 그녀들의 지친 마음을 감싸 주었다. 지금은 그 옛날 불심으로 수행한 비구니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대웅전과 삼성각ㆍ묘승전ㆍ관음전 등에 남아 있는 불심어린 비구니스님들의 독경과 염불소리는 내세의 기복과 왕에 대한 사모의 마음으로 조성된 불화에서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담은 듯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며, 정갈하고 단아한 가람, 그리고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행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세계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보문종의 총본산으로서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포교ㆍ사회복지ㆍ교육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보문사는 도심사찰로서 넓은 대지위에 대가람이 여법하게 자리잡고, 낙산의 수림과 조화를 이루며 수행도량으로서의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또 각각의 전각을 담당하는 별원이 자칫 복잡한 가람구성을 보이지만 정갈한 가람과 정진하는 비구니스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번뇌에 흔들리는 속세인이 마음자세를 다잡을 수 있는 수행도량으로서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보문사 내부

가람 배치도

보문사배치도.jpg

가람 안내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jpg

지금의 극락보전은 줄곧 대웅전으로 불려 지다가 2017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왜 극락보전이 대웅전으로 불려 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직전의 대웅전 편액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의 글씨로 극락보전 뒷편에 걸려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건륭12년(1747. 조선 영조 23년) 최초 중건되었으며, 도광4년(1824. 순조 24년) 1차 중수, 동치4년(1865. 고종 2년)에 2차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보문사 극락보전은 서울 지역 불교건축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축된 불교 건축물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며 수행 정진한 도량임이 증명되었다. 특히, 상량문과 더불어 그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량복장물도 함께 발견되어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전통성을 모두 갖춘 총본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극락보전은 팔작지붕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존불이신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부처님께서 인도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장면을 도설화한 그림으로 동치6년(1867) 금어(金魚 - 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총책임자) 경선응석(慶船應釋) 스님이 그린 석가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8호)와 호법신장(護法神將)을 그린 신중탱화(제99호)가 봉안 되었다. 내부 불단의 구조는 뒷벽에서 약간 앞으로 나와 있어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며 참배할 수 있는 전형적인 전통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석가탑

삼층석탑 三層石塔 석가탑多寶塔(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연화교 칠보교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국보 제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 백운교

청운교 靑雲橋  백운교白雲橋(국보 제23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26호)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보물 및 기타

대웅전

대웅전(보물 제1744호)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大雄殿重創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歷惠恭世,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사리탑

사리탑舍利塔(보물  제61호)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석조

석조石槽(보물  제1523호, 불국사박물관 소장) 

석조(石槽)는 큰 돌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로, 흔히 큰 절에 설치되었다. 불국사 석조는 일반적인 통일신라 석조의 형태인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부와 외부에 돋을새김 조각이 많고 모서리를 장식적으로 둥글게 한 점이 특징적이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꽃모양이 새겨져 있어 석조의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효과를 주며, 외부에는 돌림띠를 돌리고 안상(眼象) 무늬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우아하고, 장식 또한 정교하여 통일신라 석조(石造) 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을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불국사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수조의 형상이 원형인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형상인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외면에 조각이 있는 점과 다른 직사각형의 석조와는 달리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교통

지도를 불러오는 중...

Google Maps 비상업적 이용 - 공정 이용 가능

  • 대중교통

대중교통이용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자주 다니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시면 되고 경주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불국사행 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버스 : 10, 11번



  • 자가 운전

경주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 쪽으로 가다보면 불국사역 앞 구정동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902번 지방도를 따라 2.5Km 가면 불국사 앞 관광단지 주차장에 이릅니다.

경주시내에서 4번 국도를 따라 보문단지를 지나 감포방면으로 가면 덕동호 못미쳐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민속공예촌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역시 불국사 앞 관광단지 주차장에 닿습니다.

불국사 가는 길은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무척 쉽습니다.

관련 자료

  • 보물 제959-2-26호
링크 https://hoy.kr/bdeao
자료 유형 기록물
자료 명칭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 - 묘법연화경 권7
라이센스 공공누리 제1유형
  • 보물 제905-21호
링크 https://hoy.kr/CCoPs
자료 유형 기록물
자료 명칭 김성일 종가 전적 - 매월당시집
라이센스 공공누리 제1유형
  • 국보 제306-2호
링크 https://hoy.kr/M6mQ3
자료 유형 기록물
자료 명칭 삼국유사
라이센스 공공누리 제1유형


  • 신라인이 완성한 부처의 나라, 불국사 1697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w10L1siyX5A&feature=emb_title
자료 유형 비디오
게시자 EBSCulture
라이센스 CC BY
  • 지식채널e 문화유산 시리즈 비례, 균형, 조화의 불국사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Nh_6Q0ggMsc&feature=emb_title
자료 유형 비디오
게시자 Nell Lim
라이센스 CC BY
  • 사시불공(불국사)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qBybCj80iXA&feature=emb_title
자료 유형 비디오
게시자 한국불교 대표방송 BTN
라이센스 CC BY

참고문헌/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