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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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소개

성균관대.png

설립자 김창숙
개교 1398년 성균관 설립 / 1946년 성균관대학교 설립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자연과학캠퍼스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
슬로건 Unique Origin, Unique Future
분류 사립대학교
링크 성균관대학교 공식홈페이지

교시/교목

교시

  • 仁義禮智 (인의예지)

성균관대학교의 교시인 仁義禮智는 유교의 근본정신을 말해 주고 있는 기본개념이며,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마음과 행동과 옳음과 슬기의 본질을 나타내 주고 있는 4가지 덕목이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은 착하다는 性善的 본질을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교육은 결국 이 성선적 마음의 본질을 열고 싹트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仁은 사랑, 義는 옳음 ,禮는 실천, 智는 슬기이다.

교목

  • 은행나무

성균관(成均館) 안에 온 뜰을 차지하고 구름같이 솟아 퍼진 커다란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한말(韓末) 우리 겨레의 설움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도 겪고 좀 더 젊어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시절, 나라의 준총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명륜당(明倫堂)에 모여 글 읽던 것을 본 기억도 가진 나무다. 이젠 하도 늙어 몇 아름 되는 줄기 한 구석에는 동혈(動血)이 생겨 볼상 없이 시멘트로 메워져 있지만, 원기는 여전히 왕성하여 묵은 잎새 거센 가지에 웬만한 바람이 불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품이, 쓴맛 단맛 다 보고, 청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다. - 이양하의 '나무의 위의(威儀)' 중에서

  1. 강인한 생명력이다.
  2. 올곧은 선비의 기품이다.
  3. 널리 인간에게 이로운 弘益人間(홍익인간)의 정신이다.

건학이념

  • 修己治人(수기치인)

성균관대학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토대로 자기 완성과 인류평화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수기치인의 유교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하고 있다. 유교정신은 현실생활에 있어서의 실천도덕과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격도야와 학문연마를 통하여 인륜대도를 밝히고 인류공동의 이념구현에 공헌할 수 있는 국가동량의 인재를 길러내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다.

심볼마크

심볼마크.jpg

  • 은행잎

성균관대의 교목은 은행나무로, 명륜당에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잎은 역동의 발판이 되는 성균관대의 유구한 역사와 훌륭한 정신을 의미한다.

  • 4개의 빛

은행잎에 있는 초록색 빛은 성균관대의 교시인 인의예지를 상징한다. 나아가 인의예지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미래를 혁신적으로 개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 1398

1398년, 태조 이성계는 서울의 숭교방에 국립최고학부인 성균관을 설립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성균관대학교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 S

은행잎과 연결되는 S는 Sungkyunkwan, Spirit, Success의 이니셜인 'S' 를 상징한다. 이는 역사와 미래 그리고 성균관대와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급변하는 세계변화에 능동적으로 앞장서는 진취적인 성균인을 의미한다.


역사

약사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본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본 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학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대학시대는 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 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대적인 것으로 전환 발전하여 왔다.

고전대학시대 다시 고전대학시대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건학기로 1398년에서 1494년까지, 즉 태조때 성균관의 건립로부터 성종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그 시기에는 성균관의 건립과 더불어 제도상의 정비, 운영상의 시책이 적극적으로 베풀어져 최고 국립대학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제2기는 정체기로 1495년에서 1724년까지, 즉 연산군 때부터 경종때 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그 시기에는 연산군의 폭정 가운데 하나로 성균관을 한때 유연소로 삼았다가 중종이 즉위하면서 그것을 복구한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다. 또 선조때에는 임진왜란으로 성균관이 온통 소실되었다가 선조34년에 문묘가 재건되고 다시 5년 후에는 명륜당이 중건되는 곡절을 겪었다.

제3기는 부흥기로 1725년에서 1894년까지, 즉 영조 때부터 갑오경장 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문예적 부흥기를 맞아 성균관의 교육도 자못 활기를 띠었고, 또 실학자들에 의하여 교육제도에 대한 개혁론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근대대학시대 근대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개화기, 제2기는 수난기, 제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 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 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이 되었다가 1939년 명륜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조차도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연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현대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다. 제1시기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李錫九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란으로 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고등학교 안의 임시 천막교사로, 부산시 동대신동의 임시교사로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인

이황.png 퇴계이황 1501(연산군 7)∼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馬).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屛)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이이.png 율곡이이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정약용.png 다산 정약용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신채호.png 단재 신채호 1880(고종 17)∼1936.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김창숙.png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이름은 창숙(昌淑), 심산(心山)은 그의 호(號)이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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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퍼스맵선딴거.png

  • 자세히 보면 캠퍼스맵따라 그려진 빨간 선이 삐뚤빼뚤거리는데 손으로 그려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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