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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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서울 문묘(사당)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여기서 문묘란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비롯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성균관은 학교인 동시에 사당의 역할을 하며 스승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유교식 이념에 따라 건물 안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학문하는 공간을 분리해 놓았다. 
*성균과 내부의 경우 남쪽의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어 크게 교육공간과 성균관 유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로 구분된다.

-입학조건-

1.조선의 문과 제도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중 소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입학 기회를 제공
2.소과 초시와 복시에 모두 합격하면 홍패를 받고,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짐

연혁

왕조 연혁
고구려 태학 설립
신라 국학 설립 → 태학감으로 개칭 → 국학으로 환원
백제 고흥을 박사로 삼음
고려 서경에 학교 설치 → 국자감 설립 → 국학 설치 → 성균관으로 개칭
조선 현 위치에 건립 → 명륜당 소실 후 중건 → 전사청, 존경각 건립 → 임진왜란 소실 후 중건, 보수
근현대 명륜학원 설치 → 멍륜전문학교 개칭 → 광복 후 성균관으로 환원 → 성균관대학교 설립

위치

  • 지도-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 5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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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배치도-

배치도.jpeg

상징

<서울 문묘 은행나무>

문묘 은행나무.jpg
* 상단은 다섯 개의 은행나무 잎의 형상으로, 은행나무는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교육을 했던 행단의 일화에 따라 유교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은행잎 다섯 개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덕목인 오상을 표현한 것으로 인의예지신을 의미한다.
*하단의 유(儒)는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 올바르게 실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교화를 주는 수기(修己) 안인(安人)의 선비를 의미한다.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는 공자의 교육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고 있다.

-출입문-

-제향 공간-

<대성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076&cid=40942&categoryId=33084 대성전
 *성균관 대학교 내 문묘 안에 있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으로 남북으로 4영, 동서로 5영의 20칸 규모이다.
 *현존하는 공자의 위패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옮기었다가 도로 제자리에 오게 되었다.

<동무 및 서무>

 *1398년 태조가 서울 문묘를 창건할 때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후 1400년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1407년 다시 재건되었고, 1433년 증축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문묘는 1601년부터 복구되기 시작하여 1606년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이 재건된 2년 후인 1604년 삼문(신삼문)과 함께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교육 공간-

<명륜당>

*성균관 유생들이 교육 받았던 공간으로, 왕이 직접 들러 유생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명륜당의 '명륜'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의미로“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류를 밝히는 것이다"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도 경전 이해도를 측정하거나 소과,대과 시험을 시행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존경각>

*성균과 유생들의 학문 연구에 필요한 서적 부족으로 성종의 윤허 하에 '존경'이라 칭해졌다.
*장서의 출납은 2명의 전임 직원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으며 1514년에 화재로 소실 후 다시 도서의 수집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다시 큰 화를 입게 되어 남은 책이 1, 2종에 불과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고 장서도 증가되었으며, 1895년 성균관의 학제 변경에 따라 경학과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로 인하여 장서는 모두 산실되고,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그 외 건물>

*성균관의 무기고로 1743년에 건립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대사례를 실시하였는데, 대사례가 끝난 뒤에는 그 용구들을 이 전각에 보관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여자 하인들이 거주하던 곳

-부속 건물-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한때 성균관 참하관들의 휴게소로 이용되었다. 묘사(廟司)석전(釋奠)을 관리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중앙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문묘 향사 시기에 헌관제집사들이 거처하던 관청.

찾아오는길

  • 지하철
    • 4호선 혜화역, 3호선 안국역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온 후 도보, 혹은 셔틀버스를 타고 성대 정문에서 하차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온 후 151,171, 172, 272번 버스 탑승 후 하차
  • 버스
    • 마을버스
 -종로 02번(후문옥류천 하차)
 -종로 08번(명륜3가 하차)
 -대학로 07번(혜화역 1번출구 탑승)

관련영상

  • 성균관 유생들의 현실

  •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