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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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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낙산'''==

2022년 12월 1일 (목) 11:11 판


성북구의 문화재

  1. 넘겨주기

낙산

낙산(駱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 하나이다.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역사

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하여 한양에 수도가 입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을 이루며,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고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마주본다. 한양도성이 능선에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도성 5대 명승지에 이름을 올린 낙산은 조선시대 때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 만큼 풍광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인왕(仁王)·쌍계(雙鷄)·백운(白雲)·청학(淸鶴)을 도성 안의 5대 명승지로 손꼽았는데, 이 중 현재의 이화동에 있던 쌍계동이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다 하여 세 번째로 꼽혔다. 일제는 1920년부터 펼쳐진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동숭동에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했고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립했다. 해방된 뒤에 이곳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의대로 바뀌었다. 해방 뒤에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가 계속되자 서울대 학생들은 권력에 맞서 싸웠고,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면 종로의 교통이 막혀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5년에 흩어져 있던 서울대를 통합해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겼고, 그 뒤 서울대 터는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공원화되었다. 낙산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반대편의 나지막한 언덕으로 보이는 곳이다.

지명 유래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 우유를 담당하는 우유소(牛乳所)라는 기관이 조선 시대에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는데, 낙산 일대에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직영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으로도 불렸다. 낙산의 서쪽 동네는 동숭동이다. 조선 시대에는 낙산 자락에서 잣나무를 많이 길렀다 하여 본래 ‘백동’(栢洞)이라고 불렸는데, 1914년에 일제의 경성부가 동명을 만들면서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네’라고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사진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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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CC-BY by: 서울시 · Seoul


  • 대중교통

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도보 9분
*한성대입구 4번 출구 도보 24분
*창신역 1번 출구 도보 25분
*혜화역 마로니에 공원 도보 9분

버스

*간선- 100,  102,  104,  106,  107,  108,  109,  140,  143,  150,  160,  162,  273,  301,  710,  N16
*지선 - 2112
*순환 - 91s투어
*마을 - 종로07, 종로08

숙정문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지명 유래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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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 대사관로 1

  • 대중교통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6번출구에서 1111번, 2112번 상차후 성북동(명수학교 : 종점)에서 하차후 도보로 10분
*지하철3호선 안국역 2번출구 - 지선(초록)버스 종로02번 탑승하여 종점(성균관대후문)에
서 하차 - 도보 10분 - 와룡공원 도착 -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도보 10분
*지하철4호선 혜화역 1번출구 - 지선(초록)버스 종로08번 탑승하여 종점(명륜3가)에서 하차 - 도보 10분 - 와룡공원도착 -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도보 10분

관련 영상

CC-BY by:정구언kooaunchung

정릉

역사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능의 역사
1396년(태조 5)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하였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

신덕고황후 이야기

신덕고황후 강씨(재세 : ?년 ~ 1396년 음력 8월 13일)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로 책봉되었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아들(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에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태조는 신덕고황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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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교통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출구 (도보 15분)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출구 → 1014, 2115번 버스 이용 - 버스정류장 명칭 : ‘정릉입구’ 하차 (도보 15분)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출구 → 22번 마을버스 이용 - 버스정류장 명칭 : ‘세계문화유산 정릉’
  • 승용차
동대문 → 혜화로터리 → 한성대입구 방향 → 아리랑고개 방향 → 정릉

관련 영상

CC-BY by: ChrisChoi86


선잠단지

역사

- 개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마다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강남 잠실이 바로 옛 잠실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잠신이 의지할 자리인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게 되었다.
- 선잠단지와 누에치기
 선잠단지는 누에치기와 관련이 있다. 비단은 명주실로 만들고, 명주실을 얻으려면 누에치기와 뽕나무 재배가 필수적이다. 누에는 명주실을 토해내는 벌레인데 뽕잎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누에치기를 한자로는 ‘양잠(養蠶)’ 이라고 한다. 사적 제83호에 지정되어 있는 서울 선잠단지는 조선 시대에 역대 왕비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 누에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중국의 고대 전설에 전해오는,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기를 가르쳐 주었다는 잠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고, 단의 앞에는 뽕나무를 심어서 궁중의 잠실(蠶室: 누에치기를 하는 방)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을 선잠제(先蠶祭)라고 한다.
- 선잠제와 선잠단
 중국의 옛 제도인 선잠제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고려 초로 전해지며, 선잠단은 조선 정종(1400년)에 축조되었다. 성북동은 예로부터 곡물을 농사짓기 보다는 꽃이나 과일을 키우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옛날에 이곳에는 뽕나무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이곳에 선잠단을 세웠던 것도 여기에 뽕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1908년(순종 2) 7월 선잠 신위를 선농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한 후 선잠제는 중단되고 선잠단은 폐허화 되었다. 선잠단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1939년 10월 18일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부터 서울시에서 사적 제 83호로써 보호하고 있다.

사진

교통

도보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면 성북초등학교 옆에 위치함. 155m로 약 25분 소요
성북03, 1111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 앞 '삼선교. 성북문화원'정류장에서 승차. '성북초교. 성북선잠박물관'역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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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CC BY by: 문화재청

참고문헌/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1811171 양지수,이재희,조아현,김효진,박상현,최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