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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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예진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3일 (목) 20: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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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 -> 서기전 18년 온조(溫祚)가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백제(百濟)로 성장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통일을 달성한 후 신라는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성북구는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시대

'성북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호칭의 변화

고려 초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고려시대 역사 관련 문화재: 보문사

성북 지역에는 고려시대 남경의 영화를 보여주듯 보문사(普門寺)·미타사(彌陀寺)·경국사(慶國寺) 등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보문사는 성북구 보문사길 20(보문동 3가 168)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보문사.jpg

조선시대

성북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후기에는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특히 성북구는 도성의 북쪽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지명이 유래되었고, 서울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을 지나 원산에 이르는 동북방 간선도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여진과의 통로가 되었음은 물론 노원구 일대의 누원점(樓院店)과 연계되어 상인들이 통행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외에 동활인서 등 빈민구제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으며, 삼선평(三仙坪)에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성곽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북창(北倉)이 있었다.

조선시대 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으로 뽑힌 정릉과 의릉이 있다. 정릉은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의릉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장위동에는 정조 시대의 명재상인 번암 채제공의 별장이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 순조의 딸 덕온 공주가 죽자 그녀의 남편인 윤의선이 덕온공주의 묘옆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그 집이 장위동에 있는 <장위동 김진흥 가옥>이다. 묘는 현재 장위동에 없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황윤명의 별장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물려받는다.

성북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

성북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영조 대부터이다.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을현재의 성북동에 두었다. 1765년 영조 41년에 설치된 연유로 동명이 붙여졌다.

근현대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경성부 관할의 숭신면(崇信面)과 인창면(仁昌面)이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의 관할 하에 있었다.->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933년 만해 한용운 시인이 성북동에 이사와 심우장을 짓는다.

1934년 근원 김원준이 성북동에 이사 왔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되면서 숭인면의 23개 리 가운데 14개 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의 관할 하에 들어갔고, 나머지 9개 리는 그대로 고양군 숭인면으로 남게 되었다.->1936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

1937년 성북동, 돈암동, 동선동, 삼성동 일대에 택지를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있었다.

1941년 원래 혜화로터리까지만 운행했던 전차가 현재 성신여대 역 앞까지 연장되었다.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동부출장소는 동대문구역소와 성동구역소로 나뉘었고, 이 지역은 동대문구역소에 속하게 되었다.->1943년 6월 1일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동대문구역소도 동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1999년

1949년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숭인면 전 지역이 서울시 구역에 편입되었고, 동대문구 관내의 일부와 숭인면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가 탄생되었다.->1949년 8월 13일 동대문구 성북동을 성북구 성북동으로 분리신설, 8월 15일 성북 1동 행정동으로 관할

1950년 숭인출장소 소속 ‘리’가 모두 ‘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5년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성북구에는 23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성북구에 있는 경동고등학교, 한성 여중 등의 학생들도 참여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지어진 중앙정보부는 군사독재의 핵심 장소였다. 남산의 중앙정보부가 더 유명하지만 석관동의 중앙정보부가 본청이다. 남북 최초 합의서인 <7.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곳은 석관동 중앙정보부의 강당이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전 기획부로 바뀌었고, 지금은 국가정보부로 바뀌었다. 현재 중앙정보부의 자리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962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蘆海面, 노원구 일대)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이 대폭 확장되어 1962년12월 12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을 편입하였다.

1963년 1월 1일 돈암동 일부를 분리하여 법정동인 동소문동 1.2.3.4.5.6.7가, 동선동 1.2.3.4.5가 및 삼성동 1.2.3.4.5가를 설치하였다.

1970년 45개의 행정동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은 대폭 축소되었고,(1973년 7월 1일 일부 행정구역이 새로 설치된 도봉구로 분리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일부 행전구역이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에는 성북구의 석관동, 종암동, 안암동4·5가의 일부가 동대문구로, 성북구 정릉동과 하월곡동 일부는 도봉구로, 동대문구 보문동1~7가와 신설동 일부는 성북구로, 도봉구 미아동 일부는 성북구로 각각 편입 조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북구에는 모두 32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분동이 이루어져 성북구에는 39개의 법정동과 20개의 행정동이 있다.)

1988년 5월 1일 구단위 지방자치단체를 시행하여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문화

문화재

  • 심우장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이였던 한용운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일생을 심우장에서 보낸다. 심우장은 특이하게도 당시에는 보기 드믄 북향집이다.

시 혹은 노래

  • 1950년~1953년

한국전쟁에 북한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울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곳은 미아리 고개이다. 북한군이 퇴각할 때 수많은 포로를 데리고 간 것도 미아리 고개이다. 미아리고개는 북쪽의 유일한 외각 도로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 초기에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1956년에 나온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트로트곡이 있다.[1]

  • 1960년

4.19혁명에 대해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였던 조지훈은 <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시를 집필했다.

동선동에 살던 시인 신동엽은 4.19 시위를 보고 <껍대기는 가라>라는 시를 집필했다.

  • 1968년

11월 <월간 문학>에 김광섭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가 실려졌다.

현대(2000년~현재)

2007년 12월 30일 성북 1동, 성북 2동, 동소문 1가, 동소문 4가를 성북동으로 통합하여 관할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북구(城北區)

조선시대~현대

성북문화원 [10분 성북학]

성북구

성북동(서울)

성북구의 행정구역

<단장의 미아리고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