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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도 성종의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났다.
 
성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도 성종의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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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하루 세 번 경연을 열어 관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본래 하루 세 번 경연은 세종대 실시된 바 있었다.
 
성종은 하루 세 번 경연을 열어 관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본래 하루 세 번 경연은 세종대 실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세조대에는 세조 스스로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경연 자체가 자주 열리지 못하였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경연에 참석하였고, 조강, 주강, 석강의 하루 세 번 경연을 정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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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세조대에는 세조 스스로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경연 자체가 자주 열리지 못하였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경연에 참석하였고, 조강, 주강, 석강의 하루 세 번 경연을 정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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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종대 경연의 특징은 국정 현안의 문제들을 경연의 자리에서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주로 경연에서 교재를 읽고 토론하는 것을 마친 후에, 혹은 당시 현안과 관련되는 내용이 경연 내용으로 제시될 때 당시 참여한 경연관들에게 의견을 묻고 경청하였던 것이다.
 
특히 성종대 경연의 특징은 국정 현안의 문제들을 경연의 자리에서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주로 경연에서 교재를 읽고 토론하는 것을 마친 후에, 혹은 당시 현안과 관련되는 내용이 경연 내용으로 제시될 때 당시 참여한 경연관들에게 의견을 묻고 경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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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에는 연로한 대신 뿐 아니라 나이가 어린 문신들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경연에서의 현안 논의는 대신이 아닌 신진관원들의 의견을 국왕이 직접 들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경연에는 연로한 대신 뿐 아니라 나이가 어린 문신들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경연에서의 현안 논의는 대신이 아닌 신진관원들의 의견을 국왕이 직접 들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경연에서의 국정논의는 성종대 경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성종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
 
이러한 경연에서의 국정논의는 성종대 경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성종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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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554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554

2018년 12월 9일 (일) 22:17 판

소개

조선 제9대 왕 출생-사망 1457년 ~ 1494년

재위기간 1469년 ~ 1494년

가족관계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버지 덕종(德宗),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출생

성종의 이름은 혈(娎)이며, 1457년(세조 3년) 세조의 큰 아들이었던 덕종(조선)(德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뒷날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된 한씨로, 좌의정을 역임하였던 한확(韓確)의 딸이었다. 성종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사망하였는데, 세자는 성종을 매우 총애하여 궁중에서 성종을 양육하였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세조 7년)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세 살 위인 형 월산군(月山君)과 더불어 종친 직품 중 최고등급인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올랐다.

생애

성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도 성종의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났다.

성종은 하루 세 번 경연을 열어 관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본래 하루 세 번 경연은 세종대 실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세조대에는 세조 스스로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경연 자체가 자주 열리지 못하였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경연에 참석하였고, 조강, 주강, 석강의 하루 세 번 경연을 정례화하였다.

특히 성종대 경연의 특징은 국정 현안의 문제들을 경연의 자리에서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주로 경연에서 교재를 읽고 토론하는 것을 마친 후에, 혹은 당시 현안과 관련되는 내용이 경연 내용으로 제시될 때 당시 참여한 경연관들에게 의견을 묻고 경청하였던 것이다.

경연에는 연로한 대신 뿐 아니라 나이가 어린 문신들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경연에서의 현안 논의는 대신이 아닌 신진관원들의 의견을 국왕이 직접 들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경연에서의 국정논의는 성종대 경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성종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