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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단체이름'''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신간회.jpg|200px]]
 
|-
 
|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신간회''' || [[신간회]] (新幹會)
 
|-
 
| style="text-align:center;"|'''창립년도''' || 1927
 
|-
 
| style="text-align:center;"|'''폐지년도''' || 1931
 
|-
 
| style="text-align:center;"|'''이념''' || [[사회주의]], [[민족주의]]
 
|-
 
| style="text-align:center;"|'''목적''' || 조국의 독립과 일제에 대한 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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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활동분야''' || 민족적, 경제적, 정치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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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관련단체''' || [[명제세, 조선민흥회, 정우회]]
 
|-
 
| style="text-align:center;"|'''회장''' || [[이상재]]
 
|-
 
| style="text-align:center;"|'''부회장''' || [[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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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설립자''' || [[홍명희]],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백관수]], [[신석우]], [[유억겸]], [[권동진]], [[조병옥]], [[송진우]] 등 3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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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활동인원''' ||  약 3만 90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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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lyinclude>
 
  
 
==정의==
 
 
[[조선 물산 장려회]]를 모태로 하며 [[1927년]] 2월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이다.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하여 서울에 창립한 민족 운동단체이다. 하지만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분란을 겪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한다.
 
 
==배경==
 
중국에서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당]]과 [[사회주의 단체]]인 [[공산당]]이 [[1차 국공합작]](쑨원과 마오)을 맺게 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반도에서 조선 민흥회가 결성되고 정우회 선언(1926년 11월)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가 합작해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했고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가 결합하여 신간회가 탄생하였다.
 
 
===전개===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년도!!항목!!내용
 
|-
 
|1926||조선민흥회||배경으로 가장 먼저 연합이 된 단체가 [[조선민흥회]]이다.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조선물산장려회]]'가 [[사회주의 세력]]인 '[[서울청년회]]'와 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훗날 조선민흥회 회원 전원이 신간회에 참여하게 된다.
 
|-
 
|1926||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국공합작]]이 중국에서 일어나자, 충격을 받은 [[안창호]]가 우리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북경에 있던 좌익세력 대표 [[원세훈]]을 만나 '[[일대혁명당]]'의 설립을 논의하였다. 그 논의가 [[한국 독립유일당]] 북경 촉성회이다.
 
|-
 
|1926||정우회 선언||[[신간회]]의 탄생 배경과 연관이 깊다. [[사회주의]] 세력들 사이에서도 통합과 연대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분립에서 통일로' 라는 기치하에 서울에 위치한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 이렇게 4개의 사회주의 단체가 합쳐진 게 정우회이다.
 
|-
 
|1927||신간회 창립||정우회가 선언을 하고 조선민흥회에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진행하자고 제안하였다. 조선민흥회도 통합과 연대가 된 단체이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며 신간회가 창립하게 된다.
 
|-
 
|}
 
 
==상세소개==
 
===신간회 강령===
 
[[파일:신간회 강령.jpg|신간회 강령|신간회 강령 (출처:[https://blog.naver.com/gounikorea/221116479199)]]]
 
 
1. 우리는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신간회 투쟁 목표===
 
•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모든 법령 철폐
 
 
•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 부당한 납세 반대
 
 
• 산업 정책을 조선인 본위로
 
 
• 단결권, 파업권, 단체 계약권의 확립
 
 
• 경작권의 확립
 
 
• 8시간 노동제 실시
 
 
• 최저 임금, 최저 봉급제 실시
 
 
• 모든 학교 교육을 조선인 본위로 - 신간회 동경 지회의 정책 제안(일부)
 
 
===신간회 활동===
 
대표적인 활동으로 민족적, 경제적, 정치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원====
 
[[파일:광주 학생운동.jpg|광주 학생운동 관련 신문|광주 학생운동 관련 신문 (출처:[https://blog.naver.com/gounikorea/221116479199)]]]
 
 
[[광주학생운동]] 당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학생 시위를 지원하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광주실정보고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였지만 사전 발각되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44명의 간부와 총 90여명이 구속되었다.
 
 
====*[[순회강연단]] 조직====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비판하였다. 민족 당면 과제로 경작권의 확보, 일본인의 이민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협동 조합 운동 전개,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획등 등을 제시하였다. 외에도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 화전민 항일운동]]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수재만 구호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경제수호운동====
 
신간회는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를 주장하고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원산총파업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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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는 노동, 농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대표적으로 원산총파업을 적극 지원하며 최저임금제 등을 주장하였다.
 
 
==연원 및 변천==
 
[[파일:신간회 세력.png|신간회|신간회 (출처:[https://blog.naver.com/bm00344/220048807105)]]]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결사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의 성립 요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4년 전후로 널리 퍼진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표적인 기관이 만들어져 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바랐다.
 
 
둘째, 국내 [[사회주의 진영]]은 [[6·10만세]]를 고비로 활동이 점차 퇴보하자, 다시 한 번 일어설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민족주의 진영에게 좌우 합작으로 [[민족 유일당]]을 성립하자고 제의하였다.
 
 
셋째, 일제는 민족·사회주의 진영의 동태 파악과 계보 활동을 예의 추적, 구금하기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 주었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규약은 25개조로 되어 있는데,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였다. 활동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 뒤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 등과 통합을 추진, [[이상재]]와 [[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위원으로 뽑았다. 창립총회에서 35인을 선출해 간사회를 소집,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이용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 본부의 회장단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 사회·공산주의계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죽자 부회장 권동진이 그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하였다.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 대회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그 동안 기선을 제압당했던 사회·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그 골자는 간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집행위원제로 중앙의 권한을 학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을 먼저 천명한 뒤,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의 방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해,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의의 및 한계==
 
===의의===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한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한계===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이유로 일제 당국의 탄압 하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신간회는 지도부마저 일제와 타협하려는 소위 '[[민족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자 비타협적 [[반일 민족 연합]] 전선체로서의 신간회 노선은 더욱 계급 중심의 노선을 조장하고 있었다. 이후 신간회는 '[[타협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계와 [[민족주의]]계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때문에 신간회는 일제로부터 탄압받아 해산된것이 아닌 좌우 내부 분열에 의해 해산되었다는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관련인물==
 
[[파일:신간회 발기인.jpg|신간회 관련인물|신간회 관련인물 (출처:[https://blog.naver.com/gounikorea/221116479199)]]]
 
 
신간회를 대표하는 인물은 설립자 홍명희 신채호 등 34명과 활동인원 약 3만 9000여 명으로 구성된다. 회장은 [[이상재]] 부회장은 [[권동진]] 이다
 
===설립자===
 
[[홍명희]],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백관수]], [[신석우]], [[유억겸]], [[권동진]], [[조병옥]], [[송진우]] 등 34명
 
 
==관련 영상==
 
<youtube>RBsIvAd_TGg</youtube>
 
 
==네트워크 그래프==
 
[[파일:신간회 그래프.PNG]]
 
 
"이 저작물상의 네트워크 그래프는 Vis.js 네트워크 라이브러리 (Copyright (C) 2010-2017 Almende B.V. )와 MakeGraph 온톨로지 스크립트 변환기 (Copyright (C) 2017-2018 디지털인문학연구소, AKS)로 제작하였습니다."
 
 
=='''RDF'''==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신간회]] || [[정우회선언]] || B가 A에게 영향을 미치다. ||
 
|-
 
| [[신간회]] || [[홍명희, 신채호 등 34명]] || B가 A를 설립하다. ||
 
|-
 
| [[신간회]] || [[서울]] || A가 B에 위치한다 ||
 
|-
 
| [[신간회]] || [[좌우익세력]] || A가 B를 합치다. ||
 
|-
 
| [[신간회]] || [[반일사회운동]] || A는 B 이다 ||
 
|-
 
| [[신간회]] || [[지회]] || A가 B를 설치하다 ||
 
|-
 
| [[지회]] || [[일본, 서울 등 전국]] || A는 B에 위치한다 ||
 
|-
 
| [[신간회]] || [[타협주의]] || A가 B를 배격하다. ||
 
|-
 
| [[신간회]] || [[기회주의]] || A가 B를 배격하다. ||
 
|-
 
| [[신간회]] || [[조선물산장려회]] || A가 B를 모태로하다. ||
 
|-
 
| [[신간회]] || [[광주학생 항일운동]] || A가 B를 지원하다. ||
 
|-
 
| [[광주학생 항일운동]] || [[진상조사단]] || A가 B를 파견하다. ||
 
|-
 
| [[광주학생 항일운동]] || [[광주실정 보고 민중대회]] || A가 B를 시도하다. ||
 
|-
 
| [[신간회]] || [[원산 총파업]] || A가 B를 지원하다. ||
 
|-
 
| [[신간회]] || [[순회강연단]] || A가 B를 조직하다.||
 
|-
 
| [[순회강연단]] || [[갑산 화전민 항일운동]] || A가 B를 지원하다. ||
 
|-
 
| [[순회강연단]] || [[수재민 구호활동]] || A가 B를 지원하다. ||
 
|-
 
| [[순회강연단]] || [[민족의식, 항일의식]] || A가 B를 고취시키다 ||
 
|-
 
| [[신간회]] || [[경제수호운동]] || A가 B를 활동했다. ||
 
|-
 
| [[신간회]] || [[합법적 항일운동단체]] || A는 B이다. ||
 
|-
 
|}
 
 
==참고문헌==
 
『신간회연구』(이균영, 역사비평사, 1993)
 
 
「신간회운동」(송건호, 『한』79, 1978)
 
 
「신간회의 조직과 항쟁」(이현희, 『사총』15·16, 1971)
 
 
「신간회의 사회교화」(이문원, 『한국학』26, 1982)
 
 
「신간회의 창립에 대하여」(이균영, 『한국사연구)』37, 1982)
 
 
"동제사(同濟社)",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F%99%EC%A0%9C%EC%82%AC&ridx=0&tot=4 사이트]]
 
 
"좌우합작운동 '신간회'",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edward4389/221470534021 사이트]
 
 
"1920년대 독립운동 - 신간회".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legend6969/221545693659 사이트]
 
 
"신간회",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levelId=ti_028_0300 사이트]
 
 
==기여자==
 
[[권서영]]
 
 
 
[[분류:노홍우]]
 
[[분류:인문정보콘텐츠(2019)]]
 
[[분류:단체]]
 
[[분류:신간회]]
 
[[분류:1927년 설립]]
 
[[분류:1931년 폐지]]
 
[[분류:신간출고목]]
 
[[분류:조선의 정조]]
 
[[분류:민족협동전선]]
 
[[분류: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협동]]
 
[[분류:민족유일당운동]]
 
[[분류:한국의 독립운동단체]]
 
[[분류:독립운동]]
 
[[분류:항일운동]]
 
[[분류:항일단체]]
 
[[분류:일제강점기]]
 
[[분류: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분류:합법적 반일사회 단체]]
 
[[분류:최대 규모의 항일운동]]
 
[[분류:민족유일당 민족 협동 전선]]
 
[[분류:민족운동단체]]
 
[[분류:신간회 강령]]
 
[[분류:광주학생항일운동]]
 
[[분류:순회강연단]]
 
[[분류:일제강점기 시대]]
 
[[분류:일제강점기 시대의 사회운동]]
 
[[분류:민족해방운동]]
 
[[분류:결사단체]]
 
[[분류:근검절약운동]]
 
[[분류: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2022년 6월 12일 (일) 21:44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