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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 - '배우면 모든것이 즐겁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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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등어 - 'JUST SIMPLE'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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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제사밥 - 'att_i99'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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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줄불놀이 - '언제나 웃으며 살자^^'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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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옷 - 천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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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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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개치마 -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월하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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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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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양반춤 - 양산시청 홈페이지

2023년 5월 31일 (수) 01:03 판

양반의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안동 지역에서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

안동과 양반

안동은 흔히 양반 고을로 불릴 만큼 양반이 많은 곳이다. 이 같은 사실은 곧 과거 합격자와 관리로서 현달한 인물, 유행(儒行)이니 문학(文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고을마다 작성되었던 읍지류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안동(예안현 포함)의 문과 급제자는 290명, 생원·진사 합격자는 370명, 음사(蔭仕)로 벼슬에 나아간 사람은 212명, 유일(遺逸)로써 천거되거나 유행이나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은 각각 82명·41명·137명으로 총합계는 1,132명이다. 이를 안동의 양반 총수로 하여, 군현의 호구 수(2,061호)와 토지 면적(12,191결)과 대비하여 보면 호(戶)와 결(結) 각각 0.55명과 0.09명이 된다.

영남 지방의 비슷한 계수관(界首官)인 경주는 각각 0.12명과 0.01명, 상주는 각각 0.19명과 0.03명, 진주는 각각 0.16명과 0.03명으로, 안동은 비슷한 규모의 다른 고을에 비해 약 3~4배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로서도 안동에 양반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반 [兩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거환경

안동 지역의 양반들의 주거 환경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다. 이곳은 대대로 풍산류씨가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마을이며, 빼어난 자연 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삼면이 낙동강으로 둘러 싸여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연화부수의 지형이라 불리기도 하고, 산태극 수태극의 형상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아 전통적인 양반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 양반 가옥의 대표적 예인 안동 양진당을 통해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데, 대개 안채는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동 하회마을 전경2.jpg]


음식문화

간고등어

대부분의 음식 문화는 양반의 음식 문화에서 유래되게 마련으로,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인 안동간고등어·헛제사밥 등도 양반의 음식 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바다에서 꽤 떨어진 안동에서 생선은 양반들이나 먹을 수 있는 무척 귀한 산물이었다. 당시에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가까운 바다에서 고등어를 가져오는 데 통상 이틀이나 걸렸는데, 긴 이동 시간으로 인해 고등어가 상하기 쉽기 때문에 고등어의 장기간 보존을 위해 소금 간을 한 데서 안동간고등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안동 간고등어.jpg

헛제사밥

양반이 많았던 안동에서는 예부터 제사를 지내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특히 기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상에 올렸던 여러 가지 나물을 얹어서 비빔밥을 만들고 각종 산적과 해물을 곁들여 제삿밥을 먹었다. 헛제사밥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삿밥과 똑같이 비빔밥과 산적·탕국 등과 함께 먹는 음식인데, 공부하는 유생들이 밤에 출출하면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제사를 핑계 삼아 먹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안동 헛제사밥.jpg

양반의 옷과 신발

도포와 두루마기

조선 시대 남자들은 외출할 때 ‘포’라고 하는 겉옷을 입었다. 포에는 도포,두루마기 등이 있는데 두루마기는 외출할 때는 물론 집에서도 입었다. 도포는 소매가 아주 넓은 옷으로, 뒤쪽이 트여있다. 그러나 두루마기는 트인 곳이 없고 도포보다 소매가 좁다. 두루마기는 평민도 입을 수 있었지만, 도포는 양반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하지만 제사나 특별한 행사 때는 평민도 도포를 입을 수 있었어요. 양반은 비단이나 모시 같은 좋은 옷감으로 옷을 만들었다.


양반의 옷.jpg

갓은 조선 시대 남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모자예요. 처음에는 햇볕을 가리거나 비를 피하려고 썼지만 점차 화려해지면서 양반들만 쓰게 되었다.


갓.jpg

치마길이와 속옷

양반집 여자의 치마는 땅에 닿을 만큼 길고 폭이 넓었으며, 금박을 입힌 단을 치마에 대기도 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저고리와 치마가 다르고, 치마를 풍성하게 보이려고 치마 안에 다양한 속옷을 입었다.

쓰개치마

조선 시대 양반집 여자들은 외출할 때 얼굴을 보이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장옷이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장옷은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주로 초록색에 소맷부리에는 흰색 천을 대었다. 쓰개치마는 치마와 같은 모양으로, 폭과 길이가 짧고 주름을 잡아 만들었다.

쓰개치마.jpg

신발

양반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된 멋진 신발을 신었다. 양반집 여자들이 주로 신은 당혜는 가죽에 예쁜 헝겊을 씌운 신발이다. 당혜는 오른쪽, 왼쪽 구별이 없다.


당혜.jpg

놀이문화

안동 지역에서 행해지는 선유줄불놀이는 안동 지역 양반들의 놀이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선유줄불놀이는 해마다 음력 7월 16일 밤에 하회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부용대 단애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행했던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이자 축제이다. 이 놀이는 높이 70m가 넘는 부용대 단애, 그 밑을 흐르는 강변의 백사장, 소나무들의 세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문화(文華)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했으므로 서민들이 중심이 되었던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안동 선유줄불놀이.jpg


양반문화

양반춤

양반들의 신분적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느린 장단에 맞추어 거들먹거리거나, 허세를 부리면서 추던 춤.

양산양반춤의 해설 및 유래

우리나라 전통춤을 구시대의 계급에 따라 분류한다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와 민족의 중추세력이었던 양산사회의 정통춤과 무속 그리고 서민층에서 즐겨 추던 즉흥 춤으로 나눌수 있다. 이 중 궁중무는 그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무속과 서민층의 춤도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양반사회의 정통춤은 양반계급의 몰락과 함께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양산양반춤은 정갈한 조선조 양반계 호걸들의 모습을 춤으로 재현한다. 갓·망건·도포차림에 손에는 장죽과 합죽선을 든 의젓한 차림이 더 없이 깨끗하다. 춤사위는 꾸밈이 없고 담백하여 마치 조선 백자와 같이 청초한 맛을 풍기면서도 때때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담준론에 열을 올리며 천하를 눈 아래로 보는 의기가 넘치고 진퇴와 선회에 절도가 엄연하고 섬세한 선율 하나까지도 절제와 고귀함이 있다. 양산양반춤은 조선조 양반 계급사회때 사대부 귀족계열 한량들이 관기들과 여흥으로 즐겨 추던 춤이 대대로 전승되어 1930년대에 양산 권번에 정착하였다.

양산권번 고문 이주서·원장 고수길·평양명기 김농주 사범으로부터 양산양반춤을 유일하게도 김덕명(1924년~2015년)이 사사 받았으며 현재 그의 후학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양산양반춤의 특성

- 의상이 조선조 양반 차림으로서 갓·망건·도포·장죽·합죽선을 손에 든 표본적인 귀족계 양반 모습이다.

- 청초하고도 우아한 조선조 양반을 재현하는 민속적 가치가 첨가된 춤이다.

- 춤의 절도가 분명하고 점잖으며 양반의 풍모를 잘 나타낸 춤이다.

- 독무 또는 군무로도 추는 아주 좋은 춤이다.

- 양산양반춤은 다양한 표현성과 동적인 사위가 충만한 품격을 갖춘 대표적인 남성 춤이다.

양산양반춤의 의상

조선시대 양반의 평복차림으로 양반 갓ㆍ양반 망근ㆍ흑색 도포피ㆍ황색 도포ㆍ백색 바지저고리ㆍ백색 버선에 왼손에는 장죽을 들고, 오른손에는 합죽선을 든다.

양산양반춤의 음악

음악은 북ㆍ장구ㆍ쇠ㆍ징과 같은 사물장단에 맞추어서 추기도 하고 또는 삼현육각에 맞추어서 춤을 추었으나 현재는 주로 사물장단에 현악과 관악을 추가하여 사용한다.


참고문헌과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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