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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정조시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기행문집이다. 1780년(정조 4)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해 따라갔던 박지원이 당시의 문물제도를 보고들은 대로 기록했다. 역사·지리·풍속·정치·경제·문학·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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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정조시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기행문집이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연민 이가원이 소장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들이 남긴 서적 서화골동품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점을 1986년 12월 22일 기증한 자료 중에 하나인데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다.[
 
연민 이가원이 소장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들이 남긴 서적 서화골동품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점을 1986년 12월 22일 기증한 자료 중에 하나인데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다.[

2019년 12월 2일 (월) 01:41 판

개요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정조시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기행문집이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연민 이가원이 소장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들이 남긴 서적 서화골동품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점을 1986년 12월 22일 기증한 자료 중에 하나인데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다.[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이 ≪연암집≫ 원집에 이어 간행한 동 속집 권1·2(고활자본)에 들어 있고, 1911년 '광문회'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932년 박영철이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11∼15에도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편도 있고 1956년 자유중국의 대만대학에서 동 대학 소장본을 영인한 것도 있다.

'저자' 박지원

조선 후기, 정조 대의 실학자 겸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한양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지돈녕부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으며, 장간(章簡)이라는 시호까지 받은 인물이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어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현실과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혐오해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랫동안 재야의 선비로 지내면서 창작과 학문에만 전념했다. 50대 이후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 안의 현감, 면천 군수, 양양 부사 등을 역임했다.

당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중상주의를 주장하며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등이 있다.

내용 및 구성

열하일기는 총 26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평가

기록된 주요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