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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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희(2011208)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2월 7일 (월) 23:58 판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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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개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위치한 조선전기의 목조건축물로, 당대 별당 건축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 뜰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들이 무성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세 내용

오죽헌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강원 강릉시 율곡로 3139번 길 24 (죽헌동)에 위치해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주거건축물 중 오래된 편에 속한다. 이곳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이자 화가, 서예가였던 신사임당과 정치와 학문에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있으며, 이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본래 최응현의 집이었던 오죽헌은 조선전기의 결혼 제도였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그의 둘째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상속되었다. 이사온과 함께 살던 사위 신명화에게는 다섯 명의 딸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딸이 신사임당이다. 한편 용인 이씨는 이사온과 최 씨 사이의 무남독녀였다. 이사온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이자 신명화의 부인 용인 이씨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용인 이씨는 외손자들 중 넷째 딸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와 둘째 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맡는 조건으로 서울의 기와집 한 채와 전답(田畓)을,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살피는 조건으로 이 집과 전답을 주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이 집 주변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무성해서 본인의 호(號)를 오죽헌(烏竹軒)이라고 지었는데, 이것이 후에 집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오죽헌은 권처균[의 자손들이 관리해오다가 1975년부터 강릉시가 관리하게 되었고, 당해 오죽헌 정화사업 때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현재 오죽헌 일대의 모습은 1996년에 정부가 시행한 문화재 복원 계획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결과다.

오죽헌 소유권 변천사 (좌측부터)
최응현 이사온 용인 이씨 권처균 안동 권(權)씨 자손 강릉시

정면 3칸으로 지어진 오죽헌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2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측 두 칸을 차지하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세까지 생활하고 공부하던 곳이다. 우측의 온돌방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신사임당율곡 이이를 임신했을 때 동해에 사는 용이 집으로 들어와 방문 앞에 서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 점을 따 온돌방의 이름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지었다. 현재 몽룡실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회적 의의

오죽헌은 당대 사회상의 변화 양상을 잘 나타내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헌이 건립된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으로 상속에 있어서 남녀차별과 장자(長子) 우대 등 자녀 간 차별이 없는 ‘자녀균분상속’이라는 유습이 있었다. 친족의식 또한 내·외친이 동일시되어 사위와 외손에게 상속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외손이었던 율곡 이이권처균이 각각 봉사조(奉祀條)와 배묘조(拜墓條)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권처균에게 상속될 때까지 줄곧 외가로 이어지던 상속은 조선 후기로 가며 자녀불균등상속으로 변화하면서 더이상 이전과 같이 사위나 외손에게 상속되지 않았고, 이후 계속 권처균 후손들의 소유가 되었다. 권처균이 오죽헌을 상속받은 16~17세기는 조선 전기의 친족의식 등의 변화로 유교 의식이 정착된 때였다. 이 시기 오죽헌이 속한 죽헌동에 안동 권(權)씨 집거지 동성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성리학을 심화시키며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고, 이에 따라 가문의 동질성을 확보함으로써 가부장·적장자(嫡長子) 중심의 부계 친족체제도 정착되었다. 조선 전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한 유교 의례를 확립하려 했으나 당시 고려 제도 영향으로 적용되지 못했던 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주자가례(朱子家禮)』 사상 기반의 혼인제도였던 친영(親迎)이 도입되지 못하고,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는 기존 고려의 혼인 풍습을 따랐는데, 이러한 문화로 오죽헌은 사위·외손에게도 상속될 수 있었다.용인 이씨가 오죽헌을 상속한 권처균을 비롯한 외손과 다섯 딸들에게 재산을 상속한 내용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에서도 조선전기 균등 분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섯 사위들이 모두 문서 작성에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전술한 남귀여가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오죽헌은 신사임당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라는 가치와 더불어 조선 시대 상속·혼인 문화를 비롯한 풍습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오죽헌 일대

오죽헌 일대에는 어제각(御製閣), 자경문(自警門), 사랑채와 안채, 운한문(雲漢門) 등이 함께 있으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이전에는 없던 문성사(文成祠), 자경문(自警門), 입지문 등이 새로 세워졌다.
  • 문성사(文成祠)

문성사는 율곡 이이를 기리기 위해 건축되어 율곡 이이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1975년 표준 영정으로 선정되었던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이 그린 그림으로 모시고 있다. 영정 속 율곡 이이는 심의(深衣)를 입고 검은 복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仁祖)가 율곡 이이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따 문성사라고 지은 것이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쓸 정도로 율곡 이이에 대한 마음이 컸던 정조(正祖)는 1788년 율곡 이이의 대표 친필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벼루의 보존을 위해 집을 지으라고 명했고, 정조의 명에 따라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김재찬이 어제각(御製閣)을 설립했다. 원래 오죽헌 옆에 위치해있던 어제각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철거되어 원래 위치에 문성사가 들어섰으며, 1987년 오죽헌 뒷편으로 복원되었다.

  • 자경문(自警門)

자경문은 오죽헌 앞에 위치해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 이이가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집필한 『자경문(自警文)』에서 따온 이름이다.

  • 사랑채·안채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때 사랑채와 오죽헌만이 철거되지 않고 남았었다.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권진영에 의해 건축되었다.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가 새겨져있다. 안채는 철거 후 1996년 복원되었다.

  • 운한문(雲漢門)

어제각을 드나드는 문으로. 어제각을 지어진 당시 함께 지어졌다. 어제각 현판의 필체는 왕희지(王羲之)의 초서체를 본받아 작성되었다.


연혁

시기
조선 초기 최응현 소유
1504년 신사임당 출생
1536년 율곡 이이 출생
1788년 어제각 건립
1963년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
1975년 6월 30일 권(權)씨가로부터 관리 이전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
1987년 6월 어제각 복원
1996년 문화재 복원 계획 시행

위치

강원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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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대중교통 세부사항(번호)
버스 200, 203, 204, 205

'오죽헌' 정류장에서 도보 1분 소요

건축 특징

오죽헌은 건축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一)자형 평면 구조로, 본채가 아닌 별당 건물이다. 현재는 본채 없이 별당인 오죽헌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죽헌은 별당 양식의 주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며, 600여 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본채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어 별도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이 특징이다. 별당인 바로 이 오죽헌이 최응현부터 권(權)씨 자손까지 물려진 건물이며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곳이다. 건립 연대와 건립 자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최응현의 부친 최치운(崔致雲)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정확히 남겨진 사실은 없다.[1] 그러나 『율곡전서』와 『동호승람』 등의 기록을 통해 최응현이 오죽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학자들은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6칸의 오죽헌 내부를 용도로 나누면 대청은 4칸, 온돌방은 1칸 반, 그리고 뒤쪽 반칸은 툇마루로 되어있다. 반 칸의 툇마루는 당시 다른 별당들과 같이 책을 보관하는 서실(書室)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대청과 온돌방의 천장은 각각 연등 천장과 종이 천장이며, 온돌방은 벽 역시 종이로 되어있다. 지붕은 겹처마 양측면에 합각(合閣)을 해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띠어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오죽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건축적 특징은 포를 구성하는 방식인 공포(貢包) 형식의 변화다. 이를 통해 주심포(柱心包)형식에서 이익공(二翼工)형식으로의 변화가 나타나는 과도기적 모습이 보인다. 이 두 형식은 외관상으로 비슷해보일 수 있으나 지붕을 받치는 부재들이 새부리 형태로 빠져나오는 익공 형식은 주심포 형식에 비해 구조적으로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끼운 쇠서 위에 주두를 올려 공포를 꾸미는 형식이다. 큰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막돌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워 기둥 위를 익공으로 처리했다.


관련 문화재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율곡유품(벼루,토지양여서) (栗谷遺品(벼루,土地讓與書))

벼루.jpg 벼루 2.jpg 토지양여서.jpg

율곡 이이가 실제로 소유했던 벼루와 토지양여서다.
정조는 오죽헌에『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그것들을 궁(宮)으로 가져오게 했다. 벼루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1788년 정조율곡 이이의 유품을 실제로 보고 이에 대해 작성한 글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이후 정조율곡 이이의 유품을 보존할 수 있도록 어제각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토지양여서는 1597년 율곡 이이가 친필로 작성했으며, 그의 소유 토지를 권처균에게 양여한다는 증서다.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호 이씨분재기 (李氏分財記)

이씨분재기.jpg

용인 이씨가 다섯 딸들에게 상속한 재산에 대한 기록을 담은 재산분재 기록물이다. 당대 보편적이었던 재산분재 방식인 균등분배 방식으로 전·답·노비·가옥 등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다섯 사위 모두 문서 작성에 참여한 것이 특징이며 조선시대 재산분배와 상속 대상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하게 쓰이는 자료다. 다섯 딸들 뿐만 아니라 외손인 권처균에게 오죽헌과 전답을, 율곡 이이에게 서울의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상속한 것에 대한 내용도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 』에 담겨있다.
  • 천연기념물 제484호 율곡매 (栗谷梅)

율곡매.jpg

 오죽헌이 건립된 시기인 1400년경에 심겨져 신사임당율곡 이이도 직접 가꾸었다고 하는 매화나무로, 오죽헌 몽룡실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용 / 방문

오죽헌은 1998년 1월 17일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어 오죽헌/시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죽헌/시립박물관을 이루는 건물로는 오죽헌, 문성사, 어제각,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안채, 바깥채, 입지문 등이 있다.
  • 관람시간 : 09:00 ~ 18:00
  • 관람료
구분 개인 단체(30명 이상)
어른 3,000원 2,000원
청소년, 군인 2,000원 1,500원
어린이 1,000원 500원
만 65세 이상 무료 무료
  • 문화관광 해설
오전(3회) 오후(5회)
10:00, 10:30, 11:00 14:00, 14:30, 15:00, 15:30, 16:00

관련 영상

참고 문헌 및 출처

김주연·최연정,「강원도 강릉시 오죽헌」, 『한국관광레저학회 학술발표대회, 한국관광레저학회

이상균, 「강릉 오죽헌의 조선시대 사회사적 의미」,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48 No.2,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성희,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과 율곡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 중도일보, 2017.06.01

문화포털 - 오죽헌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오죽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오죽헌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동해ㆍ설악 - 오죽헌

  • 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오죽헌

문화재청

오죽헌/시립 박물관

네이버 지색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오죽헌

작성자

성지희
  1. 이상균, 「강릉 오죽헌의 조선시대 사회사적 의미」,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48 No.2, 국립문화재연구소,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