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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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은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8일 (월) 15:43 판 (작품 및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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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 및 사망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1974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학적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1921년 동경 도요야마(풍산) 중학교에 편입해서 1925년 졸업하였다. 다음 해인 1926년 동경 릿쿄(입교)대학 예과를 거쳐, 1927년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업적

1930년대

로망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하여, 1931년 7월 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求)·이하윤(李河潤)·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김진섭(金晉燮)·함대훈(咸大勳)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다.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희곡·창작·연기·연출·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극예술연구회를 주도하였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삼일극장에 「빈민가」를 공연하였고, 주영섭과 이해랑 등이 주도한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립을 후원해 「소」를 초연했다.

극작가로 등단한 것은 희곡 「토막」부터였다. 이후 극예술연구회 시기(1931~1939)에 70여 편에 달하는 연극비평과 희곡비평, 시론, 연극계결산, 희곡창작법과 영화계에 대한 조언 등을 발표하였다. 희곡으로 「빈민가」(1935), 「소」(1935) 등이 대표적인데, 이 가운데 농촌 현실과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다.

1940년대(해방전)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이사에 취임하면서 일제에 협조하였다. 1941년 2월 부여신궁 조영공사에 근로봉사하였으며, 3월 조선연극협회 산하 극작가동호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7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로 양분된 공연예술단체를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연극문화협회에서 상임평의원에 임명되었고, 12월 영화기획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임명되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조선문인보국회 주최한 결전소설과 희곡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었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일어극 각본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었다.

해방 후

해방 후 1947년 2월까지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9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과 1957년 구미와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세계 연극 흐름을 시찰하였다. 1960년과 1961년 대외활동에 전념하여 동국대학교에 연극영화학과를 창설하여 초대 학과장을 맡고 전국극장단체협의회장과 문교부 대학교수자격심사위원에 위촉되었고, 동경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 국제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62년 드라마센터를 건립하여 한국연극연구소와 연극학교, 연극아카데미 등 부설기관을 만들었고, 같은 해 전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초대 회장과 예술원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63년 동경아세아영화제 국제심사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4년 극단 드라마센터를 창설하였다. 1971년 한국극작가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우익활동

해방 이후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들을 공연했다. 주로 좌익 연극을 반대하는 우익 민족극을 주도하였고, 그 해에 이해랑과 함께 극단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조선연극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인 조선연극동맹은 유치진을 중심으로 한 우익 연극인 단체인 극예술협회와 대립하였다. 조선연극동맹은 유치진의 반공 및 공연기획 등 그의 행보에서 나타나는 보수 성향을 우익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그의 친일적 행보도 함께 묶어 유치진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진은 그의 활동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해방기의 대표 희곡으로 좌익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이 포함된 〈조국〉(1946), 〈자명고〉(1946), 〈별〉(1948), 〈흔들리는 지축〉(1949) 등을 내놓았다. 한국 전쟁 이후로는 우파적 경향성은 희석되고 영화,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실험적 기법을 시도했다.

작품 및 저서

<토막> (1932)

<버드나무선 동리의 풍경> (1933)

<빈민가> (1934)

<소> (1934)

<당나귀> (1935)

<제사> (1936)

<희곡 춘향전> (1936)

<마의태자> (1937)

<자매 1> (1938)

<부부> (1940)

<흑룡강> (1941)

<북진대> (1942)

<대추나무> (1942)

<조국> (1946)

<자명고> (1947)

<남사당> (1947)

<며느리> (1947)

<별> (1948)

<장벽> (1950)

<원술랑> (1950)

<까치의 죽음> (1950)

<통곡> (1951)

<가야금> (1952)

<처용의 노래> (1953)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53)

<푸른 성인> (1954)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1955)

<자매 2> (1955)

<사육신> (1955)

<논개> (1957)

<왜 싸워> (1957)

<한강은 흐른다> (1958)

<별승무> (1959)

<청개구리는 왜 날이 궂으면 우는가> (1964)

기타(수상내역 등)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