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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11호.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고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이 들어있고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국보 제 11호.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고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이 들어있고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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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7일 (월) 04:27 판

개요

  • 국보 제 11호.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고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이 들어있고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익산미륵사지석탑.jpg

역사

미륵사

  • 미륵사는 무왕(재위 600-641)대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1탑 1금당(金堂)이던 백제의 일반적 가람 배치와는 달리 3탑 3금당으로 독특하게 배치하여 중금당(中金堂)의 목탑을 중심으로 동금당(東金堂)과 서금당(西金堂) 앞에 각각 석탑을 세웠다. 조선시대에 미륵사가 폐사(廢寺)된 뒤 3기의 탑 가운데 목탑과 동금당의 석탑은 소실되었는데, 현재의 동쪽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금당의 석탑

  • 서금당의 석탑은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다. 원래 9층이었으나 미륵사가 폐사된 뒤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6층까지만 남게 되었고,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을 콘크리트로 덧씌운 채로 전해졌다. 1998년 구조 안전진단을 시행하여 이듬해에 해체 및 보수를 결정한 뒤 2001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해체보수정비 작업을 시작하였다.

해체 및 발굴

  • 2001년 본격적으로 해체보수정비 작업에 착수한 뒤 3년간 해체한 콘크리트가 185톤에 이르렀다. 2009년 해체보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초층 탑신의 첫 번째 심주(心柱)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 사리장엄구
    • 사리공 안에서 금제사리호와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등 96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었다. 탑지에 따르면 기해년(己亥年)인 639년(무왕 39)에 왕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석탑의 건립 연도가 밝혀졌다.

복원

  • 1998년부터 20년에 걸친 복원 작업은 남아 있던 6층까지의 원형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6층 이상은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 2010년 해체 및 발굴조사가 완료되었고, 2013년 11월 본격적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석재 조립에 착수하였다.
  • 복원 작업은 최첨단 장비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창건 당시 석탑의 기초를 조사하고 원형 기법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옛 부재 가운데 81%를 재사용하였다.
  • 2017년 12월 기단부터 6층까지의 석재 조립이 완료되었고, 2018년 6월에 복원된 석탑이 공개되었다.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 나온 기록

기록

  •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는 중에 용화산(龍華山) 밑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하하며 배례를 하였다. 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하고 바라니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을 모시고 불전과 탑·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

  • 미륵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미륵사를 세우고 그곳에 미륵상 세 구와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한 회전(會殿)을 세 곳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규모와 구조

  • 남아 있던 6층의 서남쪽 부분은 유실되고 북동쪽 부분을 중심으로 절반 가량만 남아 있었으며, 높이는 14.24m였다. 복원 결과 원래 층수는 9층이었으며 총 높이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감은사지 3층석탑(13m)의 2배에 가까운 24m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 기단(基壇)은 상하 2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너비는 약 12.5m였다.
  • 초층 탑신은 사면이 3칸씩이며, 그 중앙 칸은 내부와 통하도록 사방에 문이 있고, 탑 안의 중앙에는 네모난 커다란 찰주(擦柱)가 놓였다.
  • 각 면에는 배흘림기둥(엔타시스) 수법을 쓴 모난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평방(平枋)·창방(昌枋)을 짰으며, 다시 두공양식(枓栱樣式)을 모방한 3단의 받침으로 옥개(屋蓋)를 받쳤다.
  • 석탑의 각 부분이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구(架構) 수법도 목조 건물을 모방하기 위하여 석탑 이전에 목탑을 먼저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기라고 할 수 있다.
  • 이 석탑은 목조 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으로서, 불탑(佛塔) 건축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준다.


특징

3탑3금당식 가람

  • 미륵사의 가람은 세 공간을 동서로 배치한 3원병렬식(三院竝列式) 가람이었다. 중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구획되어 있는 각 원에는 중문과 탑·금당을 1동씩 두어 1탑1금당식 가람을 동서축선상으로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하나만을 두고 있다.
  • 동·서원에는 석탑을 두고 중원에는 목탑을 두어 결과적으로 3탑3금당을 이루고 있어 『삼국유사』의 「창건기」에 기록된 '삼소창(三所創)'이란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 백제시대의 가람배치는 1탑1금당의 배치 형식이 일반적이었으며 남북축선상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륵사는 동일 사찰 내에 이러한 1탑1금당식의 가람 세 개를 합한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미륵사지 가람배치도.jpg

독특한 가람이 생긴 이유

  • 미륵신앙 때문이다. 『미륵하생경』에는 미륵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龍華三會]을 하게 되는데 이 세 번의 설법 모임에 참가하면 누구나 구제를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국립익산박물관

개요

  • 익산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미륵사지를 비롯해 익산, 군산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전시하며 주로 백제 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한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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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안내

안내 내용
시간 평일 오전9시~오후6시
관람료 무료
시설 익산백제실, 미륵사지실, 역사문화실, 기획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