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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L)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20일 (수) 02: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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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개요

[막] 제1막

[장] 1장

오후의 햇볕이 따갑다. 겉으로 보기에 한가롭고 적막하기까지 한 농촌의 한때.

매미의 게으른 긴 울음소리 태인박씨가 양지바른 마루끝에 을씨년스럽게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책이 펼쳐져 있는 작은 사방탁자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듯 한쪽에 놓여 있다.

그녀는 이틀거리(학질병)를 앓고 있는 병중의 몸으로 햇볕을 쬐고 있는 중이다.

마당가에서는 청지기 할아범이 송기껍질(松皮)을 벗기고 있다. 그는 쌓아놓은

소나무 기둥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낫으로 껍질을 열심히 벗기다가는,이따금씩

태인박씨 쪽을 안스럽게 바라보곤 한다.

할아범이 땀을 훔친다.

태인박씨는 넋을 잃고 덩청하게 한곳을 어지 응시하다가는 또 갑자기 훌쩍훌쩍

울음을 씹는다.

이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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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데 사람이 먹게 댔으니 원 그래도 하는 수 없지요.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고 풀뿌리 나물죽으로라도 연명은 해야지. 이렇게 소나무 껍질 벗겨서

송기밥도 해먹고, 보리개떡 보리수제비로 한 끼니를 때우면서 이 여름을 넘겨야

할 판이니까요. 올봄에는 보리흉작이 들어서 그런지,마을에는 벌써 양식 떨어진

집들이 허다하다는군요, 마님? 너나 없이. 참으로 어려운 세월들입니다.

(이때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까악까악 울음운다. 할아범이 손짓을 하며 퉤퉤!

하고 침을 뱉는다.)

[할아범] 저런 놈의 방정맞은 집생들을 봤나. 훠이 훠어이!

[태인박씨] 까마귀 눈에는 죽은 귀신들의 혼령이 보인다면서요?

[할아범] 누가 그걸 알겠읍니까요? 허허허! 다 말쟁이들이 지어낸

입초사겠지요.

[태인박씨] 할아범. 님자가 또다시 일어난다면서?

[할아범] 글쎄옳습니다요! 쑥덕쑥덕 들리는 풍설에 의하면,질질 4년 동안이나

끌어왔던 강화교섭인가 뭔가 하는것이 기왓장 깨지듯이 바싹 깨져서, 소서행장과 가등천정이란 놈이 수민 왜병을 끌고 다시금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도

있고------------ 어쩠거나 나라 안팎이 근심걱정이라는군요.

[태인박씨] 난리 나면 뒤에 남은 여자와 어린것들만 불쌍하지. 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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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범] (안타까운듯) 햇살은 뜨겁지만 바람끝이 차갑습니다. 마님?

[태인박씨] ---

[할아범] 그러시다가 또 오한이라도 들면 어쩌시려구요? 마님. 그만 어서

방안으로 드십시오.

[태인박씨] ---

[할아범] 방 구들장이 차가우면 군불이라도 한번 더 지펴 그릴까요?

[태인박씨] (배시시 혼자 웃으며 흥얼흥얼 들릴듯 말듯)

[노래]"딸아딸아 양념딸아

너만곱게 잘만커라

오동나무 밑장농에

갖은장석 달아주고---"

[할아범] 아이고. 못된 놈의 세상! 쯧쯧

(다시 일을 계속한다. 사이)

[태인박씨] (혼자말로) 방안보다는

여기가 좋네! 훨씬 따뜻하고 좋아요.

[할아범] 시방 저 갓바우 산성(笠岩山城)으로. 칡뿌리랑 돼지감자 캐러

가셨읍니

다요. 새아씨랑 작금이년 하고. 도련님도 함께 따라서 말씀입니다.

[태인박씨] (혼자 생각에 골돌하다)

[할아범] 본시 돼지감자 같은 것은 산의 멧돼지들이나 파먹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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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장정은 나와서 싸우다가 죽어버리면 세상 모르고 그만이지만. 안그래요

할아범? (훌쩍훌쩍 운다)

[할아범] (위로할 말을 모른다)

[태인박씨] 그럼 우린 어디로 피난을 가지?

[할아범] (자신 있게) 마님. 그렇게 심약한 말씀을 하시면 아니됩니다. 당치

않으신 애깁니다요. 하하하. 두고 보자고. 이놈들! 지난 임진년 난리 때만 해도

우리 전라도 땅은 온전했읍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께서는 남해 바다 뱃길을 턱

버티고 앉아 계신 터라. 그것을 이 옴싹달싹도 못했읍지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인제 와서 말씀입니까요? 더구나 이곳 장성 고을까지? 까딱 없읍니다요. 마님 . 제깐 놈의 왜병들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래 온 땅덩어리를 죄다 덮고 넘을 수야

있겠읍니까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들도 있는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읍니다요.

하하하!

태인박씨가 오한이 나서 이빨을 갈며 벌벌 떨기 시작한다.

할아범은 이를 보고 새삼 당황한다.

[태인박씨] 으흐흐! 아이고. 춥다 추워!

[할아범] 그 독한 놈의 이틀거리 병이 또 발작입니다요. 아이고, 이를 어쩐다?

싸게 방으로 드십시요.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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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박씨] 아이고, 추워라. 추워

[할아범] 방안으로 들어가서 두꺼운 이불을 푹 뒤집어 쓰십시오!

이때, 기씨부인 총총히 등장.

뒤따라서 작금이와 도련님이 등장하고, 두 여인의 소쿠리에는 호미와

돼지감자가 담겨져 있으며, 도련님은 칡뿌리가 담긴 망태기를 메고 한손에는

괭이를 들었다.

도련님이 괭이를 질질 땅에 끌고 천천히 걷는 폼이 걱정스럽고 겁먹은

표정이다.

기시부인이 태인박씨를 얼른 부축한다.

[기씨부인] 아이고, 성님 얼른 들어가세요!

[태인박씨] 춥다. 추워!

[기씨부인] 밖에 나오시지 말고 방안에 누워 계세야지요. 어서요, 자아

(작금이를 돌아보며) 너는 저 송기껍질 갖다가 푹푹 삶아서 잘 울궈내도록 해라.

(그녀를 부축하여 방으로 퇴장)

[작금이] 예, 새아씨

(할아범이 뽀로통하게 서 있는 소년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에 멘 망태기를

벗겨 주며,)

[할아범] 헤헤 도련님께서 칡뿌리를 아주 큰 놈으로 캐내셨군요! 아이고 ,

크다. 사내 장정의 말뚝만큼이나 큽니다. 헤헤. (작금이에게 눈치를 주며)

도련님께서 잽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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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어머님께 꾸중을 들으신 모양이죠? 아, 뭘 하고 서 있느냐? 얼른 가서

흙먼지 털어 드리고 세술시켜야지. 도련님, 샘가로 가서 손발 씻고 얼굴을

씻으세요, 어서. 깨끗하게, 허허허.

[작금이] 알았어요. 할아범.

도련님이 뒤곁으로 돌아간다. 작금이도 소쿠리 등을 챙겨서 뒤따라 퇴장.

할아범은 칡뿌리를 토방 가에 내어놓고, 망태기와 괭이 호미 등을 한쪽으로

치운다.

잠시 흐른다.

이윽고, 기효증 등장.

[기효증] 안에 어른 계시느냐?

[할아범] (반갑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어른신! 이거 어쩐 걸음이십니까요?

[기효증] 할아범은 잘 지내셨는가? 그래 집안에는 별일 없고?

[할아범] 예, 예. 그저 모든 것이 어르신들의 원념지덕으로 허허허. (방문

앞으로 쫓아가서) 새아씨, 새아씨! 새아씨, 저 너부실(廣谷男) 큰오라버님께서

왕림하셨읍니다요? (기효중에게) 어서 마루로 오르시지요, 어르신!

[기효증] 고마우이, 할아범.

(기씨부인이 방문을 열고 나타나서 토방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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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총히 내려선다.)

[기씨부인] 큰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기효증] 애기는 어디, 밖으로 놀러나갔느냐?

[할아범] 아, 아니옳습니다. 시방 저 뒤꼈에서 소세중이랍니다요. 소인이 가서

말씀 여쭙겠읍니다. 허허허! (총총히 퇴장)

[기씨부인] 친정 어머님이랑 조카와 올케들 모두 무탁하신지요?

[기효증] 늙으신 어머님께서는 오로지, 밤낮없이 네 생각만으로 노심초

사사란다.

[기씨부인] 불효여식,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라버님.

[기효증] 물론 네 남편 김서방한테서는 상기도 소식 없겠지? 풍편이

바을귀만한 무슨 기별 같은 것이라도 말이다.

[기씨부인] (머리를 끄덕인다)

[기효증] 벌써 4년 전 일을 가지고, 어찌 그 위인을 산 목숨이라고 훗언할 수

있으랴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기씨부인] 오라버님? 바깥세상 돌아가는 형세나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기효증] 소식 못들었느냐?

[기씨부인] 무슨 말씀입니까?

[기효증] 저 경상도 거제섬 칠천랑(漆川深) 한 싸움에서 우리

삼도수군(三道水軍)이 대참패를 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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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씨부인] 저런? 어쩜 그럴 수가?

[기효증] 엊그제 칠월 열엿새 날에 일어난 일인 모양인데, 통제사 원균이

그자리에서 순국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정수사 최호(崔湖)장군도 다

함께 전사했다는 게야. 모를면 모르지만, 이번엔 전라도 땅이 온전히 못할 것

같다. 지난 임진년과도 또 달라서, 이번에는 왜병들의 목표가 이곳 전라도

지방이라는 풍문이 있으니말이다.

[기씨부인] ---

[기효증] 그래서 오래비는 시방, 건너마을 오천공(鰲川公) 어른을 찾아뵈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란다. 나라가 있은 연후에 내 집안이 있고, 군왕이

있은 연후에 신하가 있는 법. 장부가 어찌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두더지같이

숨어서만 지내랴! 그건 그렇고, 어린것과 함께 네가 친정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것이, 늙으신 어머님의 당부 말씀이셨다. 이 큰 대가집에서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겠느냐? 그러니까 너 부실 친정으로 건너와서, 한동안은 우리 모두가

같이들 지내는 게야. 이 큰오래비도 어머님,말씀을 따라서 같은 생각이다.

[기씨부인]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젓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여자가

허가영(女子許嫁纓)이면 비유대고 불입기문(非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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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故 不入其門)이라고 배웠읍니다. 오라버니.

[기효증] 무론 여자가 한번 혼인을 하였으면, 큰 변고가 없는 한 친정집

문턱을 드나들지 아니한다는 말을 왜 모르겠느냐? 허나 지금의 네 처지와 세상

형편은 사믓 달라요.

[기씨부인] 지금 집안에서 작은 우환이 있읍니다.

[기효증] 그건 또 어인 말?

[기씨부인] 큰동서님이 저렇게 병중이예요, 오라버님.

[기효증] 병이라니?

[기씨부인] 이틀거리에 걸린모양이예요.

[기효증] 그 무섭고 독한 학질병말이냐? 그놈으 역병이 작년 여름에는 온

나라를 휩쓸어서 수천 수만 사람을 죽게 했어요! 우선 네 시어머님과 조카딸을

앗아간 것 아니냐?

[기씨부인] (담담하게) 그래요. 오라버님도 아다시피, 큰동서는 일찌기

소년과수로서 딸자식 하나를 믿고 수절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딸

하나를 지난 여름 잃어버리고 나서부터는 크게 사람이 변하고 달라지셨어요.

메사에 의욕을 잃고 혼자서 웃다가 울다가 망연자실해하기도 하고, 혹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답니다. 그러다가 저렇게 작년 이맘

때와 똑같은 병에 걸리셨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일인지


[페이지] 011 모르겠어요. [기효증] 그럼 실성이라도 하셨단말이냐? [기씨부인] 반드시, 꼭 그렇진 안습니다, 오라버니. [기효증] 듣기 민망하고 참으로 딱한 일이로고! [기씨부인] 그러니 종들에게만 일을 맡길 수도 없는 것! 그러고 또 그렇지요. 집 떠난 지아비가 어느 날 불쑥 찾아들기라도 할라치면, 그 아내와 자식 자는 다소곳이 집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도리요 정 아니겠읍니까, 오라버니? 지아비가 돌아왔을 때, 집안에서 찬바람이 불면 안되는 일이지요! (다정하게 오라버니를 올려다본다) (기효증이 다가와서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두손을 감싸쥔다. 두 오누이의 끈끈한 정) [기효증] 네 심지가 한없이 곱고, 뜻이 갸륵하구나! [기씨부인] 고마워요, 오라버님! [기효증] 까칠까칠, 고왔던 손이 다 헐고, 손가락 마디마디 파랗게 꿀물 천지로구나. (사이) [기씨부인] (미소 지으며 손을 뽑아 뒤로 감춘다) [기효증] 오래비가 한가지 신칙할 일은, 사세 여차즉하면 지체말고 너부실 친정으로 건너오도록 해라. 이번에야 말로 피난을 떠나야 할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것. 미친 개떼는 피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저것들이 일진광풍일 [페이지] 012 뿐이야. 그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옆으로 비껴서기만 하면 되느니라. [기씨부인] 예에, 오라버님! 명심하겠어요. 오라버니 참, 점심 요기는 하셨는지요? [기효증] 염려마라. 먹고 왔다. 지금 부실 집에서 황룡랑 나루를 건너서 곧장 오는 길이란다. (이윽고, 도련님이 반갑게 뛰어나온다. 기효증이 덥썩 안아준다.) [도련님] 큰외삼촌! [기효증] 오냐, 반갑다. 우리 도련님 잘 있엇느냐? 하하하. [도련님] (머리를 끄덕인다) [기효증] 외할머니께서 너를 보고 싶어하시더구나. 무척이나 말이다. [도련님] 그럼, 나룻배 타고 강 건너서 가지, 머. 그렇지요, 어머니? [기효증] 허허허. 요즘 네가 읽고 있는 책 이름은? [도련님] (소학)(小學)입니다. 외삼촌. [기효증] 그래. 글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저기 칡뿌리를 단물이 날 때까지 씹듯이 읽고 또 읽어서, 네 몸과 마음에 양식이 되도록 해야 하느니라. [도련님] 벌써 네번째 읽고 읽읍니다. [기효증] 옳거니! 하하하, 기특하구나. (기씨부인에게) 아무쪼록 [페이지] 013 몸조심하기를 바란다. (다시 도련님에게) 아가, 오늘! 외삼촌이 긴한 일이 있어서 가고, 훗날 다시 와서 네가 글 읽는 모습을 똑똑히 봐야겠어? 너는 사내대장부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앞장서서 네가 머리를 돌봐야 한다. 무슨 말뜻이지 알아 듣겠느냐? [도련님] (당당하게) 예에 잘 알겠읍니다. 큰외삼촌! [기효증] 하하하. (기씨부인에게) 나는 이만 건너가 봐야겠다. (돌아서 퇴장) [기씨부인] 부디 평안히 살펴가십시오, 큰오라버님! (공손히 절한다) 기씨부인이 아들을 돌아보자, 소년은 금새 풀이 죽어 움츠러든다. [기씨부인] (다정하고 엄하게) 어미에게 고할 말이 있느냐? [도련님] 아까 산에서는 소자가 잘못하였읍니다, 어머니. [기씨부인] 저 큰 칡뿌리를 처음으로 찾아낸 것은 분명히 네가 아니렸다? [도련님] 예. [기씨부인] 그렇다면 어찌 네 것이라고 우기고, 동네아이들과 다투었느냐? [도련님] 작금이가 한사코 큰소리쳐서, 소자도 욕심이 나서 그렇게--- [페이지] 014 [기씨부인] 나는 필시 양반 선비의 자식으로서 동네 아이들한테 위세를 부린 것이겠지? [도련님] --- [기씨부인] 시비곡직을 따져서 대답을 해라. [도련님] 소자 잘못되었사옵니다, 어머님! [기씨부인] 그렇다면 종아리를 맞아야지! 무릇 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봐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마루로 올라오너라. 기씨부인이 마루로 올라가 선반에서 회초리를 챙겨들고 앉는다 소년도 따라가서 그녀앞에 종아리를 걷고 다소곳이 선다. 작금이가 뒤꼈에서 총총히 등장하여 빈다.) [작금이] 쇤네 이 못돈것 잘못입니다. 새아씨, 도련님께서는 잘못이 없고, 차라리 이 년의 종아리를 때려 주옵소서. 잘못했사옵니다, 새아씨님! 아이고 [기씨부인] (들은체도 않고 아들에게) 네가 누구냐? [도련님] (또렷하게) 개국공신 홍려부원군 온(興麗府阮君 穩) 할애비의 8세손으로 문정공 하서(文正公 河西) 어른의 증손이며, 대자 승자 기고봉(高峰奇大代)선생의 친외손자입니다. [기씨부인] 아버지는? [페이지] 015 [도련님] 남자 증자 김남중(金南重)이옵니다. 지난 계사년 진주성 싸움 때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선생과 함게 의병을 거느리고 참전하신 후 행방을 모르고 지금껏 생사 불명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기씨부인] 삼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임금님을 몰아내자, 조카 옛날 기건(奇 )할아버지께서는 그 불의와 패륜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셨다. 나중에 임금이 된 수양은 할아버님의 학문과 덕망을 아껴서 세 차례나 다시금 벼슬살이를 권했느니라. 그래도 할아버지는 눈먼 장님 흉내를 내면서 끝내 거절하고 한사코 응하지를 않으셨지. 그러자 세변째로 찾아온 수양 임금은 때에 어떻게 했느냐? [도련님] 바늘을 가지고 두 눈을 꼭 찌르는 척 시험해 봤으나 눈알을 깜짝도 않는지라, 그제서야 수양 임금님은 굳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돌아갔다 합니다. [기씨부인] 장부가 똑바로 두 눈을 크게 뜨고, 행여 눈물을 짜거나 깜박거려서도 아니되느니라! (회초리를 들어서 내리친다. 셈을 하면서) 하나, 둘, 셋, 넷--- (소년은 까닭없이 서 있고, 작금이는 울면서 어쩔줄 모른다. 할아범이 한쪽 구석에 나타나서 이 모양을 지켜본다.) [페이지] 016 [장] 제2장 한달 뒤 낮 장정 여서넛이 곡식 가마니를 갖고 뒤곁에서 돌아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간다. 한 사내는 집으로, 또 하나는 한쪽 어깨에 들쳐메고, 다른 장정은 지게에다 세 가마니씩 포개서 높이 지고 등등--- 할아범은 한쪽에 엉거주춤 서서 가마니 숫자를 헤아리고, 작금이는 절구방아를 찢다말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본다. [작금이] (퉁명스럽게) 아이고, 몰라! 아까운 곡식 가마니를 다 가져가네! [할아범] 이 사람들아, 조심 조심들 해. 곡식 쏟아질라. 보리쌀 한 틀이 천금 값이란말일세. [장정1] 허허허. 염려 놓으십시오, 영감님! [작금이] 자린고비로 아끼고 아껴서 모아놓은 양식을 그래--- 호박씨 까서 한입에 탁 털어넣기지, 머! [할아범] 불평은 무슨 놈의 불평? 잔말하지 마라, 새아씨의 깊은 뜬을 네까진 년이 알아? 저 안에 오천공 어르신이 들으시면 혼줄난다. 이것아. [작금이] 우리 식구 먹을 것도 없이 다 주는 거예요. 할아범? [할아범] 지난 임진년 때같이 오천공 어르신께서 남문(南門)거리 [페이지] 017 리에다가 창의소(昌義所)를 설치하셨다는 것 아니냐? 저 남원성(南原城) 함몰의 비보를 듣고는 분연히 일어나서 다시금 또한 례 궐기를 하신 것이지. 오천공 어른으로 말하면 이 집안의 삼종조(三從祖)뻘되는 문중 어르신이고, 그댁의 생때같은 두 아드님 역시 진주성 싸움에 나갔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으니 철천지한이란 말이다. [작금이] 아이고, 저 지긋지긋한 왜놈들! 귀신이 무얼 먹고 살지요? 저런 원수놈들 잡아가지 않고 [할아범] 남원성은 온통 불바다가 되고 쑥대밭이 됐다는 게야, 한꺼번에 관민(官民) 만여명이 떼죽음으로 몰살을 당했고, 그 경치 좋은 광한루 하며, 동헌(東軒)관아와 용성관(龍城館) 객사, 만복사(萬福寺) 큰절이 죄다 불타서 한줌 재로 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남문 창의소를 설치해 놓고 의병과 의곡(義穀)을 수집하시는 중 아니냐? 흩어져 있는 장정들을 모집하고, 좁쌀, 콩, 보리 같은 군량미를 스스로 거둬들이고말야. [작금이] (근심되어) 할아범, 그렇다면 우리 마을은 온전할까요? [할아범] 쓸데없는 생각말고, 너는 어서 네 할일이나 해! 아까 새아씨께서 무슨 분부를 내리시지 않던? [작금이] 알고 있었다고 할아범. [페이지] 018 (할아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뒤안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작금이도 따라서 퇴장. 때 맞추어, 다른쪽 안에서 오천공과 기씨부인이 등장한다.) [기씨부인] 제가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할것을 이렇게 오시도록 해서 송구스럽사옵니다. 어르신. [오천공] (감동하여) 갸륵하고 고마운 일! 참으로 뜻밖이구나, 이렇게. [기씨부인] 변변치 않게 부끄럽니다. 아무래도 저 들에서 햅살이 날 때까지 입에 풀칠은 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들도 좀 생각해서 남겨놓고 보니, 너무나 약소합니다. [오천공] 무슨 소리? 너희들도 양식이 딸려서 초근목씨로 근근이 연명한다고 내가 들었더니, 그처럼 많은 양곡을 광 속에다가 비축하고 있었다니, 원. [기씨부인] 이웃이 헐벗고 굶주리는데 나 혼자서만 배불리 잘먹다는 것은 인륜이 아니며 도리가 아니겠어요. [오천공] 그래, 그래. 남읍할 일이로다. 국란사양상(國亂思良相)이요 가빈사현처(家貧思賢妻)라더니. 바로 두고 이름이야! [기씨부인] 그런 말씀 마옵소서, 어르신, 일찌기 나라와 임금님 은혜를 두터히 입은 사대부 집안에서 한껏 염치없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천공] 역병과 흉년으로 백성이 곤핍하여 이 지경이니, 비록 마 [페이지] 019 음과 뜻은 있다 하나 좁쌀 한 바가지 기꺼히 내놓을 집이 아무 데도 없어요. 곡식을 나라에 바친다든지 소나 말 혹은 군비에 쓸 쇠붙이 같은 것을 내놓는 자에게는 그 종의 신분을 풀어주고, 양민한테는 상과 벼슬을 내린다는 납속령(納粟令)을 조정에서 발표해도, 도무지 갖다바치는 자가 없다는 것 아니냐? 지난번 창의 때와는 형세가 사뭇 다르다. 때에 우린 1천6백여 명의 의병을 모을 수가 있었고, 의곡 숫자도 자그만치 496석이나 됐어요. 그래가지고 군량미 3백석과 세포(細布) 열다섯필은 법성포(法聖浦)에서 배를 타고 저 임금님 계신 의주(義州) 행재소까지 나아갈 수가 있었고, 또 경상도 의령 땅에서 창의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佑)에게도 1백석을 보내줄 수 있었지. 때에 네 큰오래비가 의곡장(義穀將)이 돼서 너도 아다시피 큰 공훈을 세운것 아니겠느냐? (할아범, 다시 등장.) [할아범] 어르신 말씀들었읍니다. 전부 헤아려 보니, 묵은 쌀로 나락이 세 가마니하고, 좁쌀 반가마, 방아 찢지 않은 겉보리가 서른 두 가마니 옳습니다요. [오천공] 고맙네. 가서 일 보시게. [할아범] 예에- (다시 퇴장) [오천공] 풍설에 듣던대로 왜병은 고성곤과 사천 하동을 지나서 섬 [페이지] 020 진강을 건너 우리 전라도 쪽으로 처들어왔다. 그래가지고 순천과 낙안 주례를 거쳐서 저렇게 남원성을 나흘밤에 유린하고는, 전주성으로 곧장 향하고 있다는 게야. [기씨부인] 이순신 장군께서는 다시 통제사에 복위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읍니다마는--- [오천공] 열백번 잘된 일이지. 허나 배를 죄다 잃어버렸는데 무얼 가지고서 싸워? 빈손, 두 주먹으로? 하늘이 무심하고, 참으로 통분할일! 그 어른은 해남 우수영으로 들어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이). [기씨부인] 어르신을 되올 때마다 애통하고 민망한 마음뿐입니다! [오천공] 이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초개같이 죽어간 자식들. 나야 세월이 약이라고 잊을 수도 있겠다마는. 생사도 모르고 지내는 젊은것 네가 더 안타까운 일! 뿐만이 아니다. 작년 한해에는 시어머니와 조카딸을 잃고 두 초상을 한꺼번에 치르더니만, 올봄에는 또 시아버지가 뒤따라서 홧병으로 세상을 버렸으니, 생각하면 선영님네도 너무 하신 일이야! [기씨부인] 다만 한가지, 불민사고 미거한 생각으로 행여 법도에 어긋남이 있을까. 항상 저어될 뿐입니다.어르신. [오천공] 아암, 그래야지!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네 고초가 말이 아니구나. (밖으로 나가며) 그러고, 참. 네 큰오래비 기효증이는 갓바우산성으로 수성장(守城將) 윤진(尹 [페이지] 021 軫)을 만나보고 나서, 순창과 정주 방면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하고 어제 아침나절에 떠났느니라. [기씨부인] 보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오천공, 큰기침하며 퇴장. 기씨부인, 총총히 돌아서 비를 들고 두어 번 마당을 쓸어낸다. 그러다가 일손이 잡히지 않는듯 마루에 걸터앉아서 나물 바구니를 안고 나물을 열심히 다듬는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마당가의 절구통으로 간다. 절구대를 들고 서너 번 쿵쿵 방아로 찧어본다. 그러다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히 시름에 젖는다. 석양 빛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새떼들의 요란한 지저귐---) [기씨부인] (소리) 한갓 미물 새떼들도 제 깃을 찾고자 저렇게 시끄러운데, 봄바람 가을비 4개 성상입니다. 오늘밤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발 뻗고 누으시며, 잡수시는 것은 또 어떠하신지요? 입고, 벗고, 계절마다 갈아입으실 의복은 누가 마름하며, 조석 수발은 누가 곁에 있어 받드옵이까? 꿈속에서라도 받들고자 합니다. 꿈이라 말고 생시처럼 보이소서. 부디, 자주 자주말이옵니다. (낯닭이 꼭기오! 홰를 크게 운다. 기씨부인은 머리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버리고 퍼뜩 [페이지] 022 정신이 든다. 안에다 대고- [기씨부인] 할아범! 할아범? 할아범. 어디에 있어요? [할아범] 예에- 부르셨읍니까? (안쪽에서 등장한다.) [기씨부인] 아무래도 생각해 봤는데. 광속에 있는 나머지 곡식은 다른 장소로 옮겼으면 해요. [할아범] 무슨 뜻입니까, 새아씨? [기시부인] 땅속에다가 나눠 조금 감추든지- 저 대밭 속에다말씀이네. [작금이] 아, 예에. 난 또 무슨 분부시라고- 허허허. 옳으신 생각입니다. 다시금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혹 좀도둑이 들끓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대밭 속에 묻어놓은 쌀독이 한섬 반짜리는 너끈하니까. 우선 그쪽으로 퍼다 붓도록 합지요. [기씨부인] 우리 그렇게 해요. (이때 작금이가 빈 자루와 소쿠리를 끼고 총총히 등장.) [작금이] 다녀왔읍니다. 새아씨. 분부대로 보리쌀 두 말은 저 화순댁 늙은 할멈 집에 주고. 또 쌀 한 됫박과 보리쌀 두말은 거꾸리네 어미한테 갖다 주었읍니다. [기씨부인] 거꾸리네 집 산모는 어떻드냐? [페이지] 023 [작금이] 말도 마십시오, 너무나도 불쌍해서- 참말로 목불이견이었읍니다. 주먹만한 핏덩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쪽에 팽겨쳐져 있고, 애기엄미는 나뭇동만하게 퉁퉁 부어올라서 부황이 난 채로--- [기씨부인] 그래 됐다. 그만 해. 우선 너는 저녁 준비하고, 저 찧다만 보리방아도 마저 찧도록 해라. [작금이] 예, 새아씨--- (기씨부인은 할아범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작금이는 반대편으로 퇴장. 태인박씨와 도련님 등장. 태인박씨는 등에 업고 우쭐우쭐 춤추듯 하고, 소년은 좋아서 낄낄거린다.) [태인박씨] "아가아가 우리 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앞논에는 나락 심고 텃밭에는 콩을 심고 아가아가 우리 아가---" [도련님] 히히! 그만 그만- 그만 됐어요. 큰어머니. 어머니가 보시면 혼난단말야. (마당가의 평상에 내려놓는다.) [태인박씨] 호호호! 큰어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랴? [도련님] 무슨 이야기요? [태인박씨] 저기 붓바우얘기. [도련님] 그 붓바우에서 정기를 타고 우리 하서(河西) 할애비가 [페이지] 024 태어나셨다는 말? 그런 얘기는 하도 여러번 들어서 나도 안단말야. [태인박씨] 그러면 저 너머 황새골 얘기는 [도련님] 큰어머니 들어봐여, 엉? (헛기침을 하며) 에헴! 저 마을입구 동구 밖에 지금도 서 있는 붓바우는, 붓필자 바우암자. 필암(필암)이라는 바우 이름을 가졌느니라. 옛날에 이 마을에는 김도령과 이도령이라는 두 책방도령이 살고 있었다. 그래가지고는 으음. 마음씨 착한 김도령과 심술굿은 이도령이 과거를 보기 위해 산속 암자에서 3년 동안 열심히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하얀 백여우 한 마리가 어느 날 밤 김도령 앞에 나타났거든? [태인박씨] 맞다. 그래! 호호호. 그래가지고 그 백여우가 좋은 붓 한자루를 내주면서 말이, "이 붓은 내 털을 뽑아사 만든 여우붓입니다. 김도령님, 이 붓으로 부디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옵소서", 그래서 김도령은 이 붓을 고이 간직하고 과거보는 서울로 올라갔단다. 그런데 과거보는 바로 전날 밤, 심술궂은 이도령은 김도령이 잠든 틈에 몰래 그 붓끝을 싹둑 잘라버렸거든? 아의고, 아깝지 뭐냐! 김도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과거장에 나가서 붓을 찾으니, 붓이 망가져서 아무짝에도 못쓰게 돼버렸단다. (짐짓 슬프게) 그러자 김도령은 내 붓! 내 붓! 하고 소리치다가 그만 미쳐버렸다고, 한편 백여우는 마을앞 [페이지] 025 에 있는 바우에 앉아서 김도령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지, 아무리 기다렸지마 김도령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거든? 그러자 백여우도 김도령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안먹고 바우만 핥다가는, 그대로 지쳐서 죽어버리고 말았지 뭐냐 재미있고 참 슬프지? 호호 [도련님] 그런데, 이도령은 과거 시험에 됐을까? [태인박씨] 무슨 소리냐, 아가? 심술궂은 사람은 잘되는 법이 없다. 아가, 아가? [도련님] 응? [태인박씨] (불쑥) 너는 누가 더 좋으냐? 이 큰어미 하고 네 어머니 중에서- [도련님] 두 사람 다 좋지, 머. [태인박씨] 아니야. 그래도? 눈꼽만큼이라도 조금 더- 얼른 말해 봐라. 응, 아가 어서? 큰어머니가 더 좋지? (열심히 졸라대고 응석부리는 아이 같다) [도련님] 큰어머니 염려말아요. 내가 장성하면 두 사람한테 모두 효도 잘할 테니까. [태인박씨] (덥썩 쓸어안으며) 아이고 착한 내 새끼야! 그러면 그렇지. 너 이 큰어머니 박대하면 안된다. 아가, 엉?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도련님] 큰어머니 또 아파요? (기씨부인이 뒤안에서 등장하여 이 광경을 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페이지] 026 [태인박씨] (골똘하여) 그런데 우린 피난을 어디로 가면 좋으냐? [도련님] 피난은 왜, 갑자기? [태인박씨] 시방 저 왜것들은 가는 곳마다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또 여자는 집탈하고 남자는 붙잡아서 자기들 길잡이로 만든다는 것 아니냐? 아이고, 무섭고 겁난다! 겁나지, 아가? 우리 새끼는 안된다. 안돼. 우리 새끼한테 무슨 일 나면 안된단 말이다. (공포와 불안으로 벌벌 떤다) [도련님] --- [태인박씨] 네 어머니가 날 떼놓고 가면 어쩌지? [도련님] (볼멘 소리로) 왜? 무슨 말예요. 큰어머니? [태인박씨] 내가 이렇게 아프고, 하는 일도 없으니까말이다. 너희들끼리만 피난가면 나는 죽는다. 죽어! 우리 새끼는 안그렇지? 그렇지, 아가? 이 큰어미한테 얼른 대답해 봐! [도련님] --- [기씨부인] (안타깝게 다가와서) 철부지 어린것을 데리고, 형님? [태인박씨] 아니어! 아무것도 아니어. 그냥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라네. 동서한테는 미안하구먼! (돌변하여 새침을 떤다. 사이) [기씨부인] (가까스로) 몸이 약하시니까 마음도 약해진 거예요! 피난은 누가 떠난다고 그럽니까? 아까 오천공 어른 말씀이고 우리 장성 고을은 저 갓바우산성만 온전하게 지켜진다면 괜찮답니다. 형님. 아무 염려말고 마음 놓으세 [페이지] 027 요! [태인박씨] --- (기씨부인 다가와서 그녀를 가만히 쓸어안은다. 두 여인의 설음- 소년은 우두커니 바라본다. (암전) [페이지] 028 [막] 제2막 [장] 1장 며칠 뒤, 밤. 보름 지난 둥근 달이 휘영청 밝고, 이따금 부엉이소리와 멀리서 늑대의 긴 울음소리- 도련님이 마루에 앉아서 기름불 아래 글을 읽고 있으며, 그 옆에는 기씨부인과 작금이. 두 여자는 칡뿌리를 쪼개고 있다. 태인박씨는 마당의 평상에서 밝은 달을 바라보며 망연히 시름에 잠겨 있다. [도련님] (글을 읽는다) "강절 소선생(康節邵先生)이 가라사대, 길야자(吉也者)는 목불관비례지색(目不觀非禮之色)이고, 이불청비례지성(耳不聽非禮之聲)이며, 구불도비례지언(口不道非禮之言)이고, 족불천비례지지(足不踐非禮之地)니라." 강절 소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착한 사람은 눈으로는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것을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예가 아닌 것을 밟지도 않느니라--- (사이) [태인박씨] (구슬픈 목소리로 천천히 노래 부른다.) [노래] "딸아딸아 양념딸아 너만 곱게 잘만 커라 [페이지] 029 오동나무 밑장농에 갖은 장석 달아주고 깊은 곳에 논을 사고 얕은 곳에 밭 사주마." (작금이가 소리없이 일어나서 뒤안으로 들어가며) [작금이] (조용하게) 삶은 칡뿌리 더 내올까요. 새아씨? [기씨부인] 그만둬라!(혼잣말로)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청아하게 들리는 책방도령의 글읽는 목소리 얼마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정경이 겠느냐! 소리를 돋구어서 크게 읽어라 [도련님] 예, 어머니. [기씨부인] 선비가 책을 놓아서는 아니된다. 난리는 잠시잠깐이고 글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이까짓 난리가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한들 한평생이야 가겠느냐! [도련님] 깊이 명심하겠사옵니다. [기씨부인] (밤하늘을 본다. 소리) 뒤곁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듣고 행여 발자국 소리인가 하고, 동구 밖 나뭇그림자를 보고도 님의 그림자인가 두 눈 크게 뜨고, 발돋음을 해봅니다! (사이) [도련님] 어머니, 한번쯤 여쭤봐도 되겠읍니까? [기씨부인] --- (머리를 끄덕인다) [페이지] 030 [도련님] 아버님은 정말,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목숨일까요? [기씨부인] (담담하게 남의 얘기처럼 이어간다) 그걸 뉘라서 어찌 알겠느냐! 때에 진주성이 무너져 초토화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부로(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고도 하니 한가닥 소망을 걸어볼 수 있겠다마는--- 생사간에 기다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겠느냐? [도련님] 소자가 이렇게 큰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겠지요? [기씨부인] 아무렴, 그러시겠지. 아버님 얼굴을 너는 기억할 수 있겠느냐? [도련님] (머리를 갸웃하며) 똑똑히 자신할 순 없지만, 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아맞힐 수 있을 것입니다. [기씨부인] 고맙다. (사이) 가만히 생각하면, 이 어미의 죄가 너무 많구나! [도련님] 무슨 말씀이예요. 어머니? [기씨부인] 내가 정성이 부족하고 시부모님 봉양을 잘봇한 탓으로 세상을 버리게 하셨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도련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기씨부인] 집안에 있는 아녀자로서 죄가 크고, 돌아와서 아시면 얼마나 애통하고 망극해 하시겠느냐. [도련님] 반드시 어머니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소자가 낱낱이 고해서, 잘 알아듣도록 말씀드리겠읍니다. [페이지] 031-1 [도련님] 어머니, 외할머니 얼굴 보고싶으시죠? [기씨부인] 왜? 너부실 외가집에 가서 외할머니랑 만나보고, 외사촌들과 같이 놀고 싶으냐? [도련님] 너부실 동네 가면 집 앞뒤로 감나무도 많고, 큰 대추나무도 하나 서 있지요? 참말로 오래된- [기씨부인] 감나무는 우리 집 뒷밭에도 있지 않느냐? [도련님] 그런 감나무 말고, 입에 넣으면 사근사근 녹는 아주 달고 맛있는 단감이랑, 또 이렇게 큰 장두감도 있단말예요, 너부실 집에는? [기씨부인] 그래애. 대추나무에는 엄지손가락만큼씩이나 큰 파란 대추가, 옹골지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도련님] 으응-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둘째 외삼촌 막내 외삼촌이랑 냇가에 나가서 모래무지와 대사리(다슬기)도 잡아보고- 대사리는 삶아서 쪽쪽 빨아먹으면 참 맛있거든? 그러고 또 이렇게 집게 달린(손가락으로 흉내를 내며) 가재란 것 있지요, 어머니? 가재란 놈은 물속에다 두 손을 넣고 이렇게 살째기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금방 뒷걸음질로 도망쳐 버린단 말야.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니까요? 헤헤! [기씨부인] 왜 웃느냐? [도련님] 내가 가재한테 물려서 엉엉우니까, 어머니가 쫑아오다가 물속에서 넘어졌지요? 그래가지고는 발을 다쳤지요? [기씨부인] 그래. 그때 이 어미가 돌에 미끄러져서 한쪽 발목을 삐었었지!(가만히 미소 짓는다) 인제 얼마 아니면 가을 추수니까, 가을걷이 일도 끝나고 나면 우리 애기 너부실 집에 보내 주마! 뒷동산에 올라가서 알밤도 따고 말이다. [도련님] 어미닌 함께 안가고 말입니까? [기씨부인] 어미는 항시 집안 일이 바쁘단다. 그러니 작금이 하고 갔다오면 되지 않겠느냐? [도련님] 그렇다면 차라리 작금이는 말고,할아범하고 같이 가겠읍니다, 어머니. [기씨부인] 그건 네가 알아서 정할 일. 네 뜻과 생각대로 하도록 해라! 호호호. [도련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히히히. 오늘은 어머니도 기쁘시죠? [페이지] 031 [기씨부인] 그래, 그래. 기특하구나! 호호호- (모처럼 흐믓해 하며, 소년의 엉덩이를 도닥거려준다) [도련님] 오늘은 어머니도 기쁘시죠? [기씨부인] 통제사 이순신 장군께서 대승첩을 거두었다는 소식말이냐? [도련님] 저 해남 울도목(嗚@) 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때려부셨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헤헤- [기씨부인] 장하고도 장하신 일이지. 육전에서는 늘상 패하고 달아났다는 슬프고 언짢은 소식뿐이더니만, 기어히 한번 우리가 크게 이기셨구나. [도련님] 나랏님께서도 좋아하시겠지요? [기씨부인] 죽어간 혼령들도 기뻐하고, 천하만민 모두가 감읍할 일이고말고- 호호호. [도련님] 해해. 이 나쁜 놈들 혼찌검이 났을게다! 두고봐라. 왜병들아! (이때, 두 여인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일어난다. 작금이는 뒤곁에서 크게 소리치고, 태인박씨는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자지러진다. 기씨부인도 벌떡 일어선다. [작금이] (소리) 아그머니나! 누구요? 누구! [태인박씨] 아니, 저저--- 누구냐! 누구? [페이지] 032 [기씨부인] 뭣이라고? 태인박씨가 마루로 달려오고, 작금이는 쫑겨서 나온다 뒤따라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의병을 가장한 5,6명의 칼든 도둑떼들- [도둑1] 잔말 말고 조용히들 해요! 조용히 해. [기씨부인] (앞으로 나서며, 서릿발 같다) 자네들은 아닌 밤중에 아녀자들만 있는 집에서 이 무슨 행악 들인가? [도둑2] 우리는 나라와 임금님을 위해서 일어난 의병들이오. 광문 열고 곡식과 재물들을 내놓으시오. 갈길이 바쁘오 어서, 속히! [기씨부인] 어느 고을에서 창의하신 의병들이란말인가? [도둑2] 저 담양 땅에서 일어났소. [기씨부인] 행선지는? [도둑2] 갓바우산성으로 들어가야 하오. [기씨부인] 그렇다면 내 어찌 돕지 않으리. 잠시만 기다리시게! (방으로 총총히 들어간다) [도련님] (당당하게) 이 댁이 누구에 집인 줄도 모르는가, 자네들은? [도둑3] (본색을 드러내고) 흥, 선비 뼈다귀라고 큰소리치고, 그래도 하대만 하는구먼! [도둑4] (비양거림으로) 왜 모르겠소? 하서 김인후선생 종가 [페이지] 033 댁이지. (다시 잠잠해진다) (기씨부인, 광 열대를 갖고 다시 나와 소년을 막아서며 [기씨부인] (열쇠를 손에 들어보이며) 광 열대가 여기 있네! [도둑2] (다가서며 열쇠를 나꿔채려 한다) [기씨부인] 한가지 더 묻겠네. [도둑2] 뭐요? (주춤한다) [기시부인] 의병 직첩은 누구로부터 받았으며, 창의대장 함자는 어떻게 되시는가? [도둑2] 아니--- 정말 빡빡하기요, 이렇게? [기씨부인] (추상같이) 자네들은 지금 두 번 죄를 짓는 것, 첫째는 의병을 빙자했으니 의와 예를 어김이요. 둘째로는 민가를 약탈하고자 함이니 이는 나라의 국법을 어김이라--- [도둑4] (뱉듯이) 젠장, 사대부 양반놈 등쌀에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이란말이어! 흥, 양반놈 꼬락서니들 좋다. [도둑3] 자, 싸게 싸게 해치웁시다! [도둑1] 꼼짝 마라! [작금이] 아이고, 사람 살려요! (도둑1, 마루로 훌쩍 뛰어올라가서 칼을 들이대고 태인박씨와 작금이를 방으로 몰아넣는다. [페이지] 034 [페이지] 035 기씨부인은 수치와 분노 속에 그제서야 참았던 설음을 터뜨리며 깊이 오열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을 힘껏 끌어안고- (사이)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무대 뒤를 달려가고, 외치는 소리 다급하다. "피난을 가야 한다!" "갓바우성이 무너졌다." "갓바우산성이 함락됐어." "피난 나가자! 피난!" 등등- 기씨부인이, 새삼 정신을 차리고-) [기씨부인] 아가, 지금 저 소리가 무슨 뜻이냐? [도련님] 갓바우 산성이 무너졌답니다, 어머니! [할아범] (뛰쳐 들어오며) 새아씨, 피난을 가셔야겠읍니다. 피난을요! 왜병들이 우리 장성 고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읍니다요. [기씨부인] (되씹으며) 피난을? [할아범] 무슨 봉변이 있을지 모르는 일! 얼른 서두르십시오. 더 늦어지기 전에, 때를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도련님이랑 저 병약하신 마님을 데리고, 더 이상 머뭇거리고 지체할 때가 아닙니다, 새아씨! 어서요, 싸게싸게- [기씨부인] (가까스로) 그래요! 강 건너서 너부실 친정으로 찾아 [페이지] 036 가기로 하자! (기씨부인, 꽂꽂이 일어나서 주먹을 힘있게 쥔다.) [장] 2장 강의 나루터가 있는 정자(亭子), 낮 띠로 지붕을 이은 허름한 정자에 <만취정(晩翠亭).이라는 퇴락한 글씨의 편액이 걸려 있다. 만취정 왼쪽은 아래쪽으로 나루터에 이어지고, 뒤쪽(무대 안쪽)은 곧장 강의 낭떠러지가 된다. 도련님과 작금이는 정자 바닥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바라보며 쉬고, 할아범은 나루터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할아범의 지게 위에는 봇짐이 놓여 있고- [할아범] (소리쳐 부른다) 사공! 여보시오, 사공님. 뱃사공님 이쪽이요, 이쪽! 기씨부인이 태인박씨를 부축하고 올라와서 정자에 앉힌다. [기씨부인] 다 왔읍니다, 성님. 앉아서 좀 쉬세요. 자아- [태인박씨] --- (절망적으로 겁먹은 모습) [페이지] 037 [할아범] (멀리 바라보며) 아이고, 사람들 좀 봐라! [도련님] 어디, 할아범? (쫑아간다) 저기가 어디죠? [할아범] 바로 꽃바우 나루터 쪽입니다. 피난민들이 잔뜩 몰려있는뎁쇼? [도련님] 으응- [할아범] 시방 나룻배가 건너가고 있으니까, 금새 돌아올 겝니다 기다리십시오 잠깐만, 새아씨. [기씨부인] 할아범도 우리와 같이 가도록 하시게. [할아범] 웬걸요? 나루터에서 배 타신 것까지만 보고는,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읍니다. 제깐 놈들이 이 늙은것까지야 어떻게 할라구요? 이럴 때일수록 집에 앉아서 도적놈들도 지켜야지요. (멀리 본다) [기씨부인] 고마운 생각이시네, 할아범. (작금이에게) 그쪽은 내려다 보지 마라! [작금이] 시퍼런 강물이 넘실넘실, 아찔하고 겁이 납니다, 새아씨 [기시부인]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조심해라. [태인박씨] 아이고- 무섭고 무섭다! [기씨부인] 성님, 마음을 크게 잡수세요. [태인박씨] 무섭다! 무섭다! [기씨부인] 미친 개떼는 피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살째기 옆으로 비껴서기만 하면 돼요. [태인박씨] 무섭다! 무섭다! [페이지] 038 [기씨부인] 괜찮다니까요, 글쎄? 인제 강 건너서 너부실만 가면 됩니다. 강만 건너면 지척이예요. 저 아름답고 푸른, 언제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보이시죠? 자자, 힘을 내세요, 성님? 내가 이렇게 꼬옥 껴안아 드리겠읍니다! (가까이서 들리는 적의 함성과 총소리- 작금이가 마을 쪽을 바라보다 소리친다.) [작금이] 아이그머니, 우리 마을이 불타고 있읍니다, 새아씨! [기씨부인] 뭣이라고? [작금이] 온 동네가 불바다입니다. 저기요, 저기! 시꺼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이고, 나 몰라아! (발을 동동 구른다) 태인박씨만 꼼짝 않고, 모두 분노와 슬픔으로 바라본다. [할아범] 저런 망종들 같으니라구! [도련님] 저쪽에, 왜병들이 논두렁을 기어가고 있읍니다. 어머니! [기씨부인] 배는 어떻게 됐는가? [할아범] 예, 나루터로 내려가 보겠읍니다요. (황망히 내려간다) (이어, 왜병 셋이 불쑥 나타나서 그들을 둘러싼다.) [페이지] 038-1 [기씨부인] 괜찮다니까요, 글쎄? 인제 강 건너서 너부실만 가면 됩니다. 강만 건너면 지척이예요. 저쪽 너부실에 닿으면, 성님을 좀더 평안히 모시겠읍니다. 그동안 하느라고 했읍니다만 섭섭하고 불편한 점이 많으셨다면,제가 이렇게 용서를 빌겠어요. 모든 것이 어리석고 불민한 제 탓이었읍니다. 거기서는 일손도 많고 하니까 탕약도 우선 지어 드리고, 성님이 좋아 하시는 인절미 콩떡도 많이많이 해드릴께요. 자- 보세요, 성님? [도련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건너 산 밑에 보이는 마을이 너부실 동네입니다, 큰어머님. [기씨부인] 그래 맞다 아가! 그리고 언제나 유유히, 말없이 흘러 가는 이 푸른 강물도 잘 보이시죠, 성님? 저쪽 너부실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스런,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동네랍니다! 성님, 자자 힘을 내세요. 내가 이렇게 꼬옥 껴안아 드리겠읍니다! [페이지] 039 [작금이] 아이그머니- [왜병1] 잡았다! 잡았어. 헤헤. [태인박씨] 무섭다. 아이고, 무섭다. [왜병2] 각씨가 셋이다! 꼬맹이도 하나- 헤헤. [기씨부인] 썩 물러가지 못할까! 물러가거라, 이것들. 그들 포위망을 좁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태인박씨는 비명을 지르며 벼랑 아래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도련님과 작금이는 각각 잡혀 나가며, 기씨부인도 손목을 잡혀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도련님] 놔라, 이놈들아! 놔아- [작금이]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기씨부인이 가슴에서 은장도를 뽑아들고 왜병의 팔을 내리치자 엉겁결에 손을뗀다. 동시에 할아범도 벽력같이 소리치며 왜병의 등 뒤로 긴칼을 들고 달려든다. 할아범은 지게 위으 봇짐 속에서 칼을 뽑아든 것이다. [할아범] 이놈- 이쳐죽일 놈! (마지막 왜병 하나가 기겁하여 도망친다. [페이지] 040 할아범이 쫑아간다.) [할아범] (소리) 이놈들, 애기를 놓고 가거라. 애기를 놓고가! 애기- [기시부인] 아가! 아가! (긴 메아리) 기씨부인이 그자리에 기진하여 쓰러진다. 그러다가 번쩍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녀는 자신의 한쪽 팔목(왜병에게 붙잡혔던)을 우심히 들여다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경기를 하듯 몸을 부르르 떤다. 그녀는 바른손 소매끝으로 왼쪽 팔목을 닸아내고 또 닦아낸다. 때묻은 반점을 한사코 지우려는 듯이- [기씨부인] (소리) 부정한 손목이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섬 오랑캐의 징그러운 손바닥으로 찍혀진 이 더러운 반점. 콩알 만한 붉은 반점이 점점 커져서 온살갗으로 퍼지고, 마침내 피 속으로가지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아아, 부끄럽고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일. 나는 내가 나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피는 피로써 영구히 맑고, 길이길이 깨끗해야 하는 것. 이것은 내것이 아니다. 이미 내 손목이 아니야! 이윽고, 할아범이 등장하여 발 아래 엎드려 크게 운 [페이지] 041 다. [기씨부인] 눈물을 거두고 내 말을 들어요, 할아범. [할아범] --- [기씨부인] 그 칼로 이 손목을 치시게! [할아범] 예? [기씨부인] 선비 집안의 피를 받고 태어나서, 한점 부끄럼없이 살기를 내가 바랬읍니다. [할아범] 무슨 청천벽력의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절대로 불가합니다요, 새아씨. [기씨부인] 아니면, 할아범 앞에서 내가 은장도로 자진하는 꼴을 보고싶다는 말이오? [할아범] 이런 무참하고 망극한 일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어찌 일어날 수 있겠읍니까? [기씨부인] 얼른 칼을 높이 드시게. [할아범] 새아씨, 늙은놈이 이렇게 빕니다!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을 돌리십시오. [기씨부인] (까딱없이) 자, 어서! 할아범이 울며 칼을 치켜든다. 그대로 내리찍는다. 아악- (암전) [페이지] 042 [장] 3장 다시 만추정. 맑은 햇빛 속에 강물 소리 샘소리 온화하다. 남편 김남중과 큰오래비 기효증, 오천공이 할아범으로 부터 얘기를 듣고 있다. [할아범] 죄 많은 이 늙은것, 그저 능지처참으로 죽여주십시오, 서방님. [김남중] (비통하여) 그다음 얘기는? [할아범] 예에- 그런 다음에, 가까스로 몇 말씀 하더니만 눈깜짝할 사이에 그만, 저 푸른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셨읍니다. [김남중] 마지막 말은 뭣이라고 헛소? [할아범] 서방님 생사를 모르는 것이 첫째로 슬픈 일이다. 혹 이미 고인이 되어 이 세상 어른이 아니시라면, 백골이라도 찾아서 선영에 모시는 것이 도리이거늘, 그것을 못 이룬 것이 한이라고 하였읍니다. [김남중] (운다) [오천공] 그렇다면, 도련님과 작금이년 얘기는 틀림없으렸다? [할아범] 말씀 올린 그대로입니다, 어르신. [오천공] 허허, 기구한 운명이로고. 애비가 돌아오니가, 자식이 또 잡혀가다니! [페이지] 043 [김남중] 섬나라 왜국 땅덩어리를 임니가 본 데가 없읍니다, 어르신. 고생도 많이 많이 했구요. 그 어느 날이들, 집안 생각 안해 본 때가 있었겠읍니까! 오매불망, 정말로 그립고 그리웠읍니다. [오천공] 알겠다. 내가 알아. [기효증] (그를 위로하며) 어느 날인가 내가 친정 이야기를 꺼냈더니만, 그애가 하는 말이 이랬었네. "지아비가 돌아왔을 때, 집안에서 찬바람이 불면 안되는 일입니다. 어느 날 지아비가 불쑥 찾아들기라도 할라치면, 그 아내와 자식된 자는 다소곳이 집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도리요, 정 아니겠읍니까, 큰오라버니?" 허허, 말이야 열백번 옳았지. 때에 내가 고집을 부려서라도 친정으로 데려다 놨어야 했네! [오천공] 그건 그렇지 않아요. 선비 집안의 외동딸로서, 그애는 문중법도와 체통을 잘 지키면서 산 것이네. (사이) (김남중이가 유골 상자를 안고 일어난다.) [오천공] 자, 저쪽 선영으로 올라가도록 하자. 비록 시신은 없고 팔뚝 하나만 묻었으니, 후인(後人)은 이를 "팔뚝 무덤"이라고 일컬으리라! 김남중을 선두로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나간다. [페이지] 044 소복 차림의 마을 사람들의 촛불을 켜들고 등장하여 줄줄이 그를 따라간다. 천천히 움직이는 엄숙한 장례행렬- 晩歌(만가)의 구슬픈 가락이 느리게 울려 퍼진다. "어노어노 어디 가노? 황천길이 멀다해도 문지방 너머가 황천이네 어노어노 어디 가노?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사나 육십 평생이 고작이지. --- " 서서히 막 내린다. (끝)


줄거리

  • 1957년 정유재란 때의 전라도 장성의 안동마을. 여름~가을
  • 등장인물

金南重(김남중)(27)

奇氏夫人(기씨부인)(28)......남중의 처

도련님......기씨부인의 아들

泰仁朴氏(태인박씨)......기씨부인의 손위동서, 과부

오천공 (鰲川公, 54)

奇孝曾(기효증)(47)......기시부인의 큰오라버니

작금이

할아범

기타 도둑 왜병 마을사람 등 5-6명.


출판 및 공연 정보

*공연: 1986년 3월 13일~19일, 문예 회관 대극장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노경식 강 건너 너부실로 A는 B를 집필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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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