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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6일 (일) 04:07 판

요약

정유재란은 1597년 8월부터 1598년까지 12월까지 1년동안 일어난 전쟁으로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로 재차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1차 친입이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2차 침입이라고 설명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의 전쟁 기간은 7년으로'7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또한 정유재란은 명나라와 조선이 함께 일본군을 물리친 전쟁으로 정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전쟁 순서

1597

전쟁 이름 시기
칠천량 해전 7월 16일
고령 전투 8월 15일
남원 전투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8월 16일
어란포 해전 8월 27일
직산 전투 9월 7일
벽파진 해전 9월 7일
명량 해전 9월 16일
제1차 울산성 전투 12월 24일

1598

전쟁과정

원인

임진왜란 중 일본과 명은 강화를 시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운 대표적인 강화 조건은 명의 황녀(皇女)를 일본 천황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勘合)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경기·충청·전라·경상 4도를 일본에 넘길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하지만 강화는 결렬되었고 일본은 1597년(선조 30) 7월에 15만 명에 가까운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해상과 육상에서 전면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북상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사 1만 명이 의령현과 삼가현을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하고 배를 통해 낙동강을 올라오기도 하면서 1597년 8월 초순에 고령 방면에도 나타나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전개

결과

1589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전쟁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퇴로를 막으려고 했으나 순천에 주둔하던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일본군 장수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려는 명군 지휘관들의 태도로 많은 일본군은 전투 피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순신의 강경노선에 따라 조·명연합군은 순천을 빠져나가려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1월 18일과 19일에 해전을 벌였다. 이때 노량(露梁)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함선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따라서 7년간의 전쟁은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전쟁 이후

조선

일본

멀티 미디어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AydwulvueI


https://www.youtube.com/watch?v=PCaMrfTLeYw

https://www.youtube.com/watch?v=lj6uOruNmxA

이미지

참고 문헌

http://gory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oryeong&dataType=01&contents_id=GC02900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