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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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린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16일 (일) 17:03 판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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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유재란은 1597년 8월부터 1598년까지 12월까지 1년동안 일어난 전쟁으로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로 재차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1차 친입이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2차 침입이라고 설명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의 전쟁 기간은 7년으로'7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또한 정유재란은 명나라와 조선이 함께 일본군을 물리친 전쟁으로 정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전쟁 순서

1597

전쟁 이름 시기
칠천량 해전 7월 16일
고령 전투 8월 15일
남원 전투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8월 16일
어란포 해전 8월 27일
직산 전투 9월 7일
벽파진 해전 9월 7일
명량 해전 9월 16일
제1차 울산성 전투 12월 24일

1598

전쟁 이름 시기
절이도 해전 7월 16일
제2차 울산성 전투 9월 21일
사천성 전투 9월 28일
순천성 전투 9월 20일~10월 7일
노량 해전 11월 19일

전쟁과정

원인

임진왜란 중 일본과 명은 강화를 시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운 대표적인 강화 조건은 명의 황녀(皇女)를 일본 천황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勘合)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경기·충청·전라·경상 4도를 일본에 넘길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하지만 강화는 결렬되었고 일본은 1597년(선조 30) 7월에 15만 명에 가까운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해상과 육상에서 전면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북상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사 1만 명이 의령현과 삼가현을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하고 배를 통해 낙동강을 올라오기도 하면서 1597년 8월 초순에 고령 방면에도 나타나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전개

결과

1589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전쟁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퇴로를 막으려고 했으나 순천에 주둔하던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일본군 장수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려는 명군 지휘관들의 태도로 많은 일본군은 전투 피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순신의 강경노선에 따라 조·명연합군은 순천을 빠져나가려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1월 18일과 19일에 해전을 벌였다. 이때 노량(露梁)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함선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따라서 7년간의 전쟁은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전쟁 이후

조선

조선 측 사망자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180,000여 명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북궁에 위치한 건축물들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사서를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를 뺀 나머지는 모두 소실 되었다. 경북궁의 파괴로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우헤도 한동안 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용했다. 이외에도 민가 많은 수,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었고 경작지 중 66%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백성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애국심과 자아반성을 하는 등 명(明)을 향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다. 또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으며, 전란 중 명군이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이 크게 영향받았다.

일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교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던 다이묘들(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불참하는 등 불협화음으로 7년을 이어오다가 히데요시 사후 일본군은 조선을 철수하였고, 몇년 후 도요토미 정권은 되었고 에도 막부(1603년)가 들어서게 된다. 일본은 7년간의 긴 전쟁을 통해 조선에서 가져간 문물인 도자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조선의 도공을 일본으로 데려가 도자기를 제작하게끔 양호한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을 통해 일본은 도자기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며, 활자(活字)를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 발전을 이롭게 하였고 조선의 서적을 통해 일본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은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많은 국력을 소모시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당시 명은 만력제가 재위 중이였는데 그는 초반에 국민들과 나라를 위해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조선 출병까지 포함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명의 재정은 고갈되어갔으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위해서 만력3정에 소요된 경비보다도 많은 은자 800만냥을 지출하는 등의 낭비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명은 세금은 늘어나는데도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이 임진왜란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멀티 미디어

관련 영상

영화로 보는 설민석의 역사이야기 1부 전쟁의 신, 이순신


13척의 기적 명량 대첩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재침략한 '정유재란'이 발생한 이유

이미지

노량해전.jpg

노량해전

1598년 노량에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그린 그림


노량해전을 담은 병풍.jpg

노량해전 병풍

1598년 벌어진 노량해전을 담은 병풍 그림


순천왜성 전투.jpg

순천왜성 전투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순천왜성 전투


참고 문헌

디지털고령문화대전

위키백과 정유재란

위키실록사전 정유재란

위키백과 임진왜란 전투 목록

노량해전 사진

노량해전 병풍사진

순천왜성 전투 사진

역주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화순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