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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다. 나도향의 본명은 경손(慶孫), 필명은 빈(). 1902년 3월 30일 서울 청파동 1이 56번지에서 출생. 나성연(羅聖淵)과 김성녀(金姓女) 사이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도향의 소설은 초기에는 백조파 특유의 감상적(感傷的)이고 환상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나, 「여이발사」 이후에 사소한 사건이라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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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하기도 해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었다.
  
  
=='''생애'''==
 
  
*'''1917년''' [[공옥학교]](攻玉學校)를 거쳐,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에 뜻을 두어 할아버지 몰래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송달되지 않아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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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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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내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9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박종화]](朴鍾和)·[[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에 이어 11월부터 장편 「[[환희]](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한편, 「옛날의 꿈은 창백(蒼白)하더이다」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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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은화백동화]](銀貨白銅貨)」 · 「[[17원50전]](十七圓五十錢)」 · 「[[행랑자식]]」 발표
 
  
*'''1924년''' 「[[자기를 찾기 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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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25년''' 「[[벙어리 삼룡(]]三龍)」 · 「[[물레방아]]」 · 「[[뽕]]」 등 발표
 
  
*'''1926년'''  일본에 다시 건너가 수학의 뜻을 이루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26년 8월 26일 결핵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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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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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배재고보를 졸업 후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문학 수업을 위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러나 조부가 학비를 보내지 않자, 되돌아와 1919년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1921년 『배재학보』에 「출향」을 발표하고, 뒤이어 『신민공론』에 단편 「추억」을 발표하면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는 박종화(朴鍾和)‧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 그리고 현진건(玄鎭健)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제2호에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했다. 또한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환희(幻戱)」를 연재하여 소년 문사로 주목을 받았다.
 
  
  
「녯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1922), 「17원 50전」(1923), 「은화」(1923), 「춘성(春星)」(1923) 등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하다가, 「여이발사」, 「행랑자식」 등을 발표하면서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한다. 1924년에 「자기를 찾기 전에」,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을 발표하고, 1925년에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 등의 완숙한 작품을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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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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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godang.goorm.net/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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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hoga.wo.to/choga8/choga8-1.htm 조만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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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081801095&code=100100 미군이 가장 주목한 지도자는 조만식…5인 평가표 발굴 ] -경향신문
  
1926년에 수학(修學)의 뜻을 품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 후 폐병을 앓으면서 단편 「피 묻은 몇 장의 편지」, 「지형근」, 「화염에 싸인 원한」 등을 발표했다. 1926년 8월 26일 사망했다. 사후에 장편 「어머니」(1939)가 출간되었다. 그는 가통인 의술을 이으려는 조부의 고집으로 방랑과 낭만의 꿈이 짓밟혀 실연과 병과 가난 속에서 단편 20여 편과 장편 2편, 그리고 「그믐달」(1925) 등 수필 몇 편을 남기고 있다. 그의 소설은 초기에는 백조파 특유의 감상적(感傷的)이고 환상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러나, 「여이발사」 이후에 사실적인 경향으로 변하여 사소한 사건이라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객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인 「뽕」, 「물레방아」 같은 수작을 남겼으며, 탐미적 경향인 「벙어리 삼룡」으로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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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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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장규식,역사공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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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 조만식 사상의 연구노트』(홍만춘,혜림출판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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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 조만식 회상록』(고당 기념사업회 편,조광출판,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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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그는 누구인가」(김명섭,『주간조선』,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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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http://godang.goorm.net)
  
 
=='''작품목록'''==
 
 
=='''외부 링크'''==
 
* [http://godang.goorm.net/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choga.wo.to/choga8/choga8-1.htm 조만식 연보]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081801095&code=100100 미군이 가장 주목한 지도자는 조만식…5인 평가표 발굴 ] -경향신문
 
*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9215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59주기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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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50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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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테러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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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반공주의자]]
 
[[분류:한국의 반전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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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상인]]
 
 
[[분류:대한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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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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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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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2022년 6월 15일 (수) 17:15 판


개요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하기도 해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내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외부 링크


참고문헌

  • 『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장규식,역사공간,2007)
  • 『고당 조만식 사상의 연구노트』(홍만춘,혜림출판사,2004)
  • 『고당 조만식 회상록』(고당 기념사업회 편,조광출판,1995)
  •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김명섭,『주간조선』,2006)
  •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http://godang.goor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