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계급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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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의 인구와 주민'

'세종실록지리지'의 인구 통계는 국역을 담당하는 인구만을 파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등재된 동래현의 호구는 389호에 1,400명이다. '경상도지리지'에는 290호 2,416명이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실제 1/3,1/5 정도만 파악된 것으로, 실제 호구는 약 1,200호에 7,000명으로 보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후기의 인구 통계자료에 따르면, '실록읍지' 등을 통해 확인되는 동래의 호수는 1740년 5,461호로부터 1871년 7,662호에 따른다. 인구수는 1740년 1만 9099명에서 1832년 3만 2158명으로 증가했다. 이 통계 수치는 실제 인구보다 적게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추정 호수는 약 7,521~1만 946호, 추정 인구수는 약 2만 7284~5만 3597명이다. 전기에 비해 후기에 인구가 증가한 정도로 유추해보아 동래 지역이 상업과 외교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외부로부터 인구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에 작성된 해운대 『동하면 호적 대장(東下面戶籍臺帳)』에 등재된 가옥은 모두 초가였으며, 기와집은 1채도 없었다. 1904년 『동래군 가호안(東萊郡家戶案)』에서도 동래군(東萊郡) 8개 면 4,779호 가운데 기와집은 89호[1.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18~20세기 초 동래의 지배적인 가옥 형태는 초가였으며, 기와집의 비중은 극히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 표현되는 하층민, 주로 영세 소농·빈농층의 구성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급 사회의 변화

'조선 초중기'

양반 중심의 사회. 조선 초기에 세습 신분은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이 있었다. 직업의 종류,귀천에 따라 양인에는 사(士)·농(農)·공(工)·상(商)의 구별도 존재했다. 왕권이 자리잡고, 관료조직이 정비된 후, 관료들은 지배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굳혔다. 양인 내에서도 향리나 농민같이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을 마련하였다. 하급관리·지방행정실무자·기술관 등은 별도로 중인(中人)신분을 이루었고, 농업·상업·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민(常民)이 되었다. 그 밑에는 천민신분으로 노비·광대·사당·무당·창기·백정 등이 속하였다. 특히 노비는 공공기관이나 개인에 소속되어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초기 이러한 사회적 신분은 왕의 선택을 받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세습되는 경향이 많았다. 때문에 신분 변화가 이뤄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조선 후기'

한정된 관직의 수는 대립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관직에 종사한 자는 국가로부터 경제적 혜택과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을 바꿔 힘을 얻고자 하는 세력은 19세기에 들어서자 점점 커져갔다. 납속책(納粟策)이나 족보의 위조, 학생을 사칭하여 양반신분에 오르고, 또는 양반과 혼인을 하여 양반이 되는 경우도 있어 양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양반 내에서 계층이 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집권당파의 권세 있는 양반인 권반(權班), 향촌사회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鄕班)·토반(土班), 그리고 농민과 다름없이 몰락한 잔반(殘班) 등이 나뉘어졌다. 노비들 중에서는 도망을 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방식으로 상민(常民)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1801년에는 관청에 소속된 노비가 모두 해방되고, 1894년에는 사노비까지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신분제를 폐지하여 완전히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였다. 

관련영상

역사채널e - The history channel e_조선의 갑(甲), 양반

역사채널e - The history channel e_조선후기 무역상인, 임상옥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선 초중기 양인과 천인 A에는 B의 구분이 있었다.
조선 후기 양반의 몰락 A에는 B가 일어났다.
조선사회 신분제의 혼란 A에는 B가 발생했다.


참고 문헌

지식백과:조선의 사회구조 지식백과:조선 시대의 사회 구조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