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교 청년 동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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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에 젊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불교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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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피탈 직후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寺刹令)을 제정·공포하면서 전국 1,300여 사찰이 30권역(30본산)으로 나누어졌다. 각 권역마다 본사를 두고 해당 권역의 사찰은 말사로서 서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본사의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고 말사의 주지는 지방장관이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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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불교종단의 인사와 재정문제까지 간섭하여 모든 사찰재산도 총독이 관리하게 되면서 종단은 불가피하게 조선총독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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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일제의 강압정책이 유화정책으로 전환된 틈을 타 한용운을 주축으로 한 중앙학림(中央學林:지금의 동국대학교)의 젊은 학승(學僧)들이 항일구국투쟁을 목표로 1920년 6월 20일 조선불교청년회를 발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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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0본산 주지 가운데 혁신·유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종수원(宗數院)을 설립하여 횡포를 가하던 교무원들과 대결하는 한편, 한용운은 1911년 이후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벌여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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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에는 개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불교유신회를 따로 조직하여 1922년 1월 조선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는 한용운을 총재로 추대하여 종단 개혁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종단의 중앙 통할기관으로 각황사에 선(禪)·교(敎) 양 종의 중앙총무원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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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총독부가 반대하여 새로운 통합기관으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생겼으나 종단 내의 대립으로 한때 총무원과 교무원으로 나뉘었다가 1924년 4월 가까스로 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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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조선불교총동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탄압이 심해지자 모든 항일운동이 비밀결사조직으로 변하였고 한국불교청년들의 실질적 활동도 광복될 때까지 중단되었다. 1948년 11월 11일 조선불교청년회가 재창립하고 1962년 6월 20일 대한불교청년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2022년 6월 15일 (수) 22:07 기준 최신판

개요





내용

요약: 일제강점기에 젊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불교단체


국권 피탈 직후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寺刹令)을 제정·공포하면서 전국 1,300여 사찰이 30권역(30본산)으로 나누어졌다. 각 권역마다 본사를 두고 해당 권역의 사찰은 말사로서 서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본사의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고 말사의 주지는 지방장관이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종단의 인사와 재정문제까지 간섭하여 모든 사찰재산도 총독이 관리하게 되면서 종단은 불가피하게 조선총독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강압정책이 유화정책으로 전환된 틈을 타 한용운을 주축으로 한 중앙학림(中央學林:지금의 동국대학교)의 젊은 학승(學僧)들이 항일구국투쟁을 목표로 1920년 6월 20일 조선불교청년회를 발족하였다.

1923년 30본산 주지 가운데 혁신·유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종수원(宗數院)을 설립하여 횡포를 가하던 교무원들과 대결하는 한편, 한용운은 1911년 이후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벌여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개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불교유신회를 따로 조직하여 1922년 1월 조선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는 한용운을 총재로 추대하여 종단 개혁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종단의 중앙 통할기관으로 각황사에 선(禪)·교(敎) 양 종의 중앙총무원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총독부가 반대하여 새로운 통합기관으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생겼으나 종단 내의 대립으로 한때 총무원과 교무원으로 나뉘었다가 1924년 4월 가까스로 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1927년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조선불교총동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탄압이 심해지자 모든 항일운동이 비밀결사조직으로 변하였고 한국불교청년들의 실질적 활동도 광복될 때까지 중단되었다. 1948년 11월 11일 조선불교청년회가 재창립하고 1962년 6월 20일 대한불교청년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