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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일보는 시대일보를 이어 발행된 일제강점기 한글 신문 《중외일보》 1926년 11월 30일 ~ 1931년 6월 19일까지의 신문을 디지털화한 자료이다. 중외일보는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인수하고서 1926년 11월 15일 창간한 신문이다. 지령은 시대일보를 잇지 않고 창간호를 제1호로 시작한다. 중외일보는 1929년 9월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주로 이우식(李祐植)이 자리했으나 이후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31년 6월 19일 지령 1492호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중외일보는 이후 판권의 변동을 거쳐 중앙일보로 개제되어 발행된다.
 
중외일보는 시대일보를 이어 발행된 일제강점기 한글 신문 《중외일보》 1926년 11월 30일 ~ 1931년 6월 19일까지의 신문을 디지털화한 자료이다. 중외일보는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인수하고서 1926년 11월 15일 창간한 신문이다. 지령은 시대일보를 잇지 않고 창간호를 제1호로 시작한다. 중외일보는 1929년 9월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주로 이우식(李祐植)이 자리했으나 이후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31년 6월 19일 지령 1492호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중외일보는 이후 판권의 변동을 거쳐 중앙일보로 개제되어 발행된다.
  
==등장인물 및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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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문서방 - [[간도]]로 이주하여 중국인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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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일보≫가 발행을 중단하자 李相協이≪中外日報≫라는 제호로 바꾸어 9월 18일 총독부로부터 새로운 신문의 발행 허가를 얻었다. 이상협은≪시대일보≫의 인원과 시설을 인수하여 11월 15일≪중외일보≫를 창간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상협, 인쇄인은 金正琪였다. 이상협은 신문 제작의 鬼才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기간에 편집과 경영 양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언론계를 주름잡던 사람이었다.
* 문서방의 처 - 딸을 빼앗긴 후 화병으로 병들어 '용례'를 부르며 죽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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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례 - 문서방의 외동딸. 빚 값으러 '인가'에게 잡혀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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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외일보≫는 “가장 값싸고 가장 좋은 신문”을 표방하였는데,≪동아일보≫와≪조선일보≫는 하루 6면 발행에 1개월 구독료가 1원이었던 데 비해≪중외일보≫는 하루 4면 발행이었지만 1개월 구독료가 60전이었다. 이와 같은 염가 정책으로 먼저 창간된≪동아일보≫·≪조선일보≫와의 차별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누적된 경영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1928년 12월 6일자 논설<職業化와 醜化>로 인해서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정간은 42일 만인 이듬해 1월 18일에 해제되었으나 2월 12일에야 속간되었다.
* 인가 - 중국인 지주. 탐욕스럽고 악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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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협은≪중외일보≫의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내용을 시도하였으며 1929년 9월부터는 조석간 8면 발행을 단행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동아일보≫·≪조선일보≫도 8면으로 맞서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재력이 빈약한≪중외일보≫로서는 스스로 시작한 이와 같은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게 되어 1931년 6월 19일자로 종간호를 낸 후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다.
  
  

2022년 6월 6일 (월) 23:56 판

소개

중외일보는 시대일보를 이어 발행된 일제강점기 한글 신문 《중외일보》 1926년 11월 30일 ~ 1931년 6월 19일까지의 신문을 디지털화한 자료이다. 중외일보는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인수하고서 1926년 11월 15일 창간한 신문이다. 지령은 시대일보를 잇지 않고 창간호를 제1호로 시작한다. 중외일보는 1929년 9월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주로 이우식(李祐植)이 자리했으나 이후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31년 6월 19일 지령 1492호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중외일보는 이후 판권의 변동을 거쳐 중앙일보로 개제되어 발행된다.

특징

 ≪시대일보≫가 발행을 중단하자 李相協이≪中外日報≫라는 제호로 바꾸어 9월 18일 총독부로부터 새로운 신문의 발행 허가를 얻었다. 이상협은≪시대일보≫의 인원과 시설을 인수하여 11월 15일≪중외일보≫를 창간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상협, 인쇄인은 金正琪였다. 이상협은 신문 제작의 鬼才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기간에 편집과 경영 양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언론계를 주름잡던 사람이었다.

 ≪중외일보≫는 “가장 값싸고 가장 좋은 신문”을 표방하였는데,≪동아일보≫와≪조선일보≫는 하루 6면 발행에 1개월 구독료가 1원이었던 데 비해≪중외일보≫는 하루 4면 발행이었지만 1개월 구독료가 60전이었다. 이와 같은 염가 정책으로 먼저 창간된≪동아일보≫·≪조선일보≫와의 차별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누적된 경영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1928년 12월 6일자 논설<職業化와 醜化>로 인해서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정간은 42일 만인 이듬해 1월 18일에 해제되었으나 2월 12일에야 속간되었다.

 이상협은≪중외일보≫의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내용을 시도하였으며 1929년 9월부터는 조석간 8면 발행을 단행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동아일보≫·≪조선일보≫도 8면으로 맞서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재력이 빈약한≪중외일보≫로서는 스스로 시작한 이와 같은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게 되어 1931년 6월 19일자로 종간호를 낸 후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다.


  • 발단 - 빈농인 문서방이 서간도로 이주하여 인가의 소작인이 됨.
  • 전개·위기 - 소작료 체납으로 인가에게 외동딸 '용례'를 빼앗김. 이로 인하여 아내가 죽음.
  • 절정·결말 - 문서방은 인가의 집에 방화하고 인가를 죽임.

신문

개요

유형: 문헌
시대: 근대
성격: 신문
제작시기: 1926년 11월 15일(창간), 1931년 9월 2일(폐간)
간행.발행.발급자: 이상협

해설

1927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작품이다. 백두산 서북편 서간도의 바이허라는 가난한 마을에 사는 소작인 문서방이 중국인 지주에게 빚 대신 딸을 빼앗겨 아내가 죽자 지주집에 불을 지르고 딸을 되찾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의 체험에 근거한 박진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만주 체험의 극한적 상황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에서 중국인 지주에게 딸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문서방의 모습에는 식민지 시대 만주로 이민을 떠난 한민족의 극한적인 상황이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다. 조선에서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고향을 떠난 농민은 만주에서도 여전히 소작인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국가가 없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고욕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극한적인 궁핍과 이에 대한 저항은 최서해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특징이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렇게 슬픈 중에도 그의 마음은 기쁘고 시원하였다. 하늘과 땅을 주어도 그 기쁨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라고 하는 대목은 주인공이 방화와 살인을 통해 굴욕과 억압을 청산하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궁핍과 고통에 시달려온 하층민의 투쟁의지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간절함을 그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서해의 문학에 있어서 폭력은 반항의 변증법이며 굶주린 자의 적의로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인공들은 어떤 시각의 환상 또는 착란 상태를 으레 겪게 되는데, 이러한 환상은 가해관계에 있다고 믿는 대상과 피해자의 음영들이다. 여기에서 그의 문학이 단순한 빈궁문학의 영역을 넘어서 프로문학과도 맥이 닿는 이념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관련영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항목A와 항목B의 관계 비고
홍염 최서해 A를 B가 집필했다
홍염 신경향파 문학 A는 B로 분류된다
홍염 문서방 A는 B를 주인공으로 한다
홍염 간도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홍염 빈궁문학 A는 B로 분류된다
홍염 현대문학 A는 B로 분류된다
홍염 단편소설 A는 B로 분류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현대문학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