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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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인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5일 (수) 21:46 판 (작성자 및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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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27년 현대평론사에서 이관용·이긍종 등이 정치·경제·사회평론 등을 다룬 잡지·종합문예잡지.


내용

1927년 1월에 창간되어 1928년 1월에 종간되었다.

이관용(李灌鎔)·이긍종(李肯種)·하준석(河駿錫)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신문지법(新聞紙法)」에 의한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통권 제11호로 폐간되었다(그 중 제10호는 압수되었다).

편집경향은 다소 보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거의 매호마다 20∼30면, 심할 때는 50여면씩 삭제를 당하면서 간행되었다.

「출판법」에 의하여 간행되는 잡지가 아니라 「신문지법」에 의하여 간행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 등 시사문제(時事問題)를 논평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조선사정연구회(조선민중의 사정을 과학적 태도로 조사, 연구함을 목적으로 1925년 9월에 창립된 단체)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잡지였다.

문학방면에도 관심을 가져 문예란에 이병기(李秉岐)의 시조 「으스름 달밤」, 나도향(羅稻香)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 실리기도 하였다.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잡지사상 『개벽』과 더불어 2대언론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목표

현대평론의 창간자 이긍종(李肯鍾)은〈창간에 제하여〉에서 《현대평론》의 목표를 밝혔다.

그는 “······ 《현대평론》의 사명은 이 복잡한 현대를 과학적으로 해부하여 써 우리의 향방과 전로(前路)를 비취임에 있나니,《현대평론》은 대중의 친한 벗이요, 여론의 밝은 거울이라,‘사람답게 살자'‘날로 새롭자'‘정의(正義)로 나가자’함은 《현대평론》의 3대 정신이요, 우리로 하여금 궁지에서 활로(活路)를 찾기 위하여‘민족의 자각과 단결을 환기(喚起)’하고‘산업의 만회(挽回)와 진흥을 기도(企圖)'함은《현대평론》의 두 가지 목표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일제의 모진 탄압

《현대평론》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한국잡지사》(김근수 저, 1980, 청록출판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제 2호는 1927년 3월 1일에 발행되어 권두언‘우리는 크게 보자’전문(全文)(1면), 한별의 시평(時評) 중‘경계 중의 조선'(12행),‘언론의 탄압’전문, 주요한의 시〈나아가자> 전문,‘정치운동의 일반적 경향' 중 11행, 이찬(李燦)의‘백남운(白南雲) 씨의〈자치운동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읽고' 중 7행, 김형배(金亨培)의‘획일적 교육제도를 배(排)함' 중 10행 등이 삭제 당했다.


제 3호는 1927년 4월 1일에 발행되어, 양건식(梁建植)의‘명기(名妓) 원원(圓圓)’전1면, 김동환(金東煥)의 희곡 〈역천군(逆天群)〉 27행이 삭제당했고, 제4호는 5월 1일 발행, 한별의 ‘시평(時評)’ 전문(3면), 윤기정(尹基鼎)의 소설〈빙고(氷庫)〉전문(19면), 최서해(崔曙海)의 소설〈이중(二重)〉전문(15면), 이종익(李鍾翊) 역 '조선농지문제에 취(就)하여’전문(14면), 복면생(覆面生)의‘유희계(遊戱界) 잡감’중 32행 등이 삭제 당했다.


이렇게 제 3호와 8호 사이에 발행된 것들도 많이 삭제를 당했으며,


제8호는 9월 1일 발행되어, 이적효(李赤曉)의‘국제청년데이의 사적(史的) 고찰’1면 12행이 삭제당했고, 제9호는 10월 1일 발행인데, 최독부(崔獨夫)의‘조선공산당사건의 관계자 인물만평(漫評)’전문(23면), 대관생(大觀生)의 시평(時評) 중 11행이 삭제 당했다. 또 제10호는 11월·12월 합병호를 발행했으나 전량 압수되어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2권 제1호가 되는 제11호는 다음해(1928) 1월에 발행했으나, 이것으로써 종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RDF 및 네트워크 그래프

RDF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평론

《개벽》 폐간 후에 나온 현대평론

작성자 및 기여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