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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성문이다. 본래는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나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현재는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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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성문이다. 본래는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나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현재는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br/>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르지만 본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br/>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르지만 본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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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8일 (토) 13:39 판


요약

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성문이다. 본래는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나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현재는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르지만 본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128)과 4호선(421)의 동대문역이 흥인지문의 아래를 지난다.

상세설명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 도성에 딸린 8문 가운데 하나로 정동(正東)방향에 있어 동대문이라고도 부른다.
1963년 보물 제 1호로 등록되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의 8문 가운데 유일하게 '之'자가 이름에 들어간다. 원래 '흥인문'이었던 이 문의 이름이 언제부터 '흥인지문'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철종실록까지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 이 문을 고쳐 지으면서 흥인지문으로 바꾼 것으로 유추한다. '之'를 넣은 이유로는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유추되는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사방위 중 동쪽만 지(地)의 기세가 부족하였기에 지(地)의 음을 따서 지(之)를 덧붙였다고 한다.
흥인지문은 현재의 모습을 하기까지 1396년 축성 이후 여러번의 고쳐짓는 과정을 거쳤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시기 목적
1396년(태조 5년) 최초 축성
1453년(단종 원년) 수리
1869년(고종 6년) 성문, 중층 문루 개선

1869년에 있던 공사를 통해 우리가 아는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역사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역사는 1396년에 지어져 622년이 지난 2018년까지 현존하고 있으니 흥인지문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하다.


선조실록

선조실록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일어났을 당시 부산포에서 20일 만에 한양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군대가 흥인지문 밖에 이르러 선 뜻 들어오지 못하다가 수십 명의 군사를 먼저 입성시켜 종루까지 이르러 조선군이 한사람도 없음을 확인하고 흥인지문으로 입성했다.


사직서의궤 (선조 30년)

정유재란(1597년) 왜구가 재차 침입하여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서쪽 지방으로 옮겨 황해도 수안군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다시 환도하였다. 이때 선조가 흥인지문 밖에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맞이하였다.


국조보감 (정조조 1, 즉위년 7월)

국조보감

1776년 7월 영조대왕을 원룽에 발인하는 날 정조가 발인 행차를 따르려 했으나 신하들이 이러한 전례가 없었다며 간쟁하자 그제야 흥인지문 밖에서 절하고 하직하였다. 영가가 멀어진 후에도 정조는 그대로 선 채로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는데, 슬픔에 찬 곡성이 사람을 감동시켜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1899년에는 새로운 도로 계획으로 돈의문에서 청량리 구간에 개설된 전차가 흥인지문의 홍예문과 옹성의 개구부를 통과함에 따라 성문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로의 폭을 넓히고 1926년 경성운동장 건립을 위해 흥인지문 북쪽과 남쪽 성벽이 크게 철거된다. 전부를 철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을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였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면서 흥인지문의 홍예문이 폐쇄되어 출입이 불가능해졌고, 현재는 상징성만 남은 거대 조형물처럼 도로 교차로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건축양식

흥인지문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을 하고 있다.

이것의 형태는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흥인지문 성벽의 석축은 높이 6.8m, 석재의 단수는 12단으로, 태조, 세종, 숙종시기 축성 의 특징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흥인지문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한성의 성문 8개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흥인지문 근처의 지형이 적을 막아내는 데 적합하지 않았기에 인공적으로라도 약점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다만 옹성의 한쪽 에만 통로가 있는 편문 형식으로 문은 달지 않았다.

통로의 방향을 한쪽으로 치우쳐 반원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성문을 감추고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조선시대 처음 축조된 옹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시기별 축성의 특징
시기 건축 부분 건축 특징
1396 도성 성곽 불규칙한 잔 석재, 성의 경사면 기울기도 큰 편
세종 성곽 하부 모가 둥근 석재를 쌓음
세종 성곽 상부 태조 때 사용된 잔 석재를 활용
숙종 도성 성곽 정방형으로 다듬어 벽돌을 쌓듯 빈틈이 없이 견고하게 축조

관련 사진

주변 명소

DDP.jpg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동대문패션타운.jpg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동대문 시장)


동대문역사문화공원.jpg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양도성박물관2.png

한양 도성 박물관


동대문성곽공원.jpg

동대문 성곽 공원

관련 동영상

관련 동영상
이름에 '之'가 들어가는 이유를 설명한 영상이다.
1957년 5월 20일에 있었던 동대문 보수공사 상량식과 관련한 뉴스화면이다.
2018년 3월 9일에 있었던 동대문 방화시도와 관련한 뉴스화면이다.
동대문과 관련되어 있는 동요인 '동대문을 열어라'의 음원이다.

참고문헌, 출처

참고문헌 : 정은주. (2016). 한양 도성의 동문, 흥인지문과 주변 이야기. 미술사와 문화유산, 5, 79-109.

사진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2018.12.01

사진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2018.12.06

사진출처 : 문화재청(국조보감),http://www.cha.go.kr, 201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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