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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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노동자, 농민 등을 대상으로 삼는 계몽적 성격의 문학이다. 흔히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고도 한다.

역사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고, 조선 또한 그런 사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3.1운동 이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조선인들의 자아각성, 문화정책으로 노선을 바꾼 일제, 일본 유학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 문학 등 여러 사건들이 맞물려 1920년대의 문단은 낭만주의와 계급주의 문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급문학은 신경향 문학으라는 이름으로 김기진과 박영희에 의해 조선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김기진과 박영희에 조선에서 퍼져나가던 신경향 문학, 이른바 계급문학은 1925년에 본격적으로 세를 불리기 시작하는데. 그 중심에는 1922년에 조직된 염군사(焰群社)와 1923년에 조직된 파스큘라(PASKYULA)가 하나가 된 조직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약칭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가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카프는 기관지 <문예운동>을 창간하며 계급문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계급 문단을 집중하고 조직화 시키는 등 계급문학에 있어서 강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계급문학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고 그 중심이 되었던 카프이지만, 동시에 조선에서의 계급문학은 크든 적든 카프의 영향 아래에 있게 되었고, 이는 후술할 두 번의 방향전환 논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두 번의 방향전환 논쟁

1927년 카프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기진이 박영희의 <철야>와 <지옥순례>를 비평한 것으로부터 한 논란이 점화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카프의 문인들은 계급문학에서 추구해야할 것이 예술적 완성인가, 계급 이념의 전파를 위한 수단인가로 분리되었으며, 이를 흔히들 내용-형식 논쟁이라 한다.

이 논쟁으로 인해 김기진을 필두로 하여 무산자 계급을 위한 문학이되, 현실 대중적 확산을 위해 예술적 완성도를 중요시 하는 예술대중화론이 주장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박영희를 필두로 하여 계급문학의 이념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자연발생적 현실의 문학에서 목적의식적 문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목적의식론이라 한다.

내용-형식 논쟁은 박영희의 부전승으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카프에서는 계급문학운동의 지향성을 분명하게 정하고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이로인해 계급문학은 형식적 완결성보다는 이념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또한 극도의 정치지향성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 1차 방향 전환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방향전환이 조직적, 이념적으로 변화하자 계급문학에 있어서도 방향전환 문제가 대두되었다. 박영희로 대표되는 카프의 경성본부는 예술운동과 대중적 정치 투쟁은 별개라는 지론을 고수하였으나, 이북만을 필두로 한 동경 지부는 대중을 도외시한 의식 투쟁은 불가능하다 여겨 이를 요구했다. 이 2차 방향전환 논쟁의 승리자는 이북만의 승리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이북만, 임화를 필두로 계급문학의 볼셰비키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계급문학은 너무나도 정치 투쟁의식에 집중하였고, 민족운동으로서의 토대를 잃게 되었다. 또한 계급문학의 볼셰비키화론을 통한 문학 운동의 정치적 진출은 이후 일본에 눈에 띄어 카프 제 1차 검거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31년과 1934년 두차례에 걸친 집단적인 검거사태와 언론 탄압으로 인해 카프 조직 와해 위기와 함께 계급문학은 점차 퇴조해갔다.

의의

조선에서의 계급문학은 문학창작 활동을 카프를 비롯한 조직 활동의 집단적 이념에 반강제적으로 맞출 것을 요구하게 만들었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문인들에게 공동체적인 운명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 계급문학의 중심으로서 여러 문인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조직의 와해가 곧 계급문학의 퇴조를 의미했던 것을 보아하면 너무나도 카프에 의존하는 형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