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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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돈암동의 독립운동가이다. 돈암동에 거주하던 김규식은 1907년 군대해산 후 연천 등지에서 허위 등과 함께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형 15년을 받았다.
이후 만주로 망명,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참가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1년 반대세력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에서 출생

1896년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의 처자 주명수(朱明洙)와 서울에서 혼인, 슬하에 4남 1녀.

1906년 의병 가담

1907년 허위와 함께 이인영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2월 양주군에서 결성된 13도 창의군에 합류

1907년 일본군과 교전중 총상 후 체포되나 탈출

1908년 1908년 4월을 전후하여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

1912년 만주로 망명

1919년 8월 군정부의 중심인물로 활약,그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활동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보병대대장으로 활약하여 대첩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군대의 지휘를 책임지는 총사령의 중책에 임명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1922년 9월 1일 연해주 지역 한인빨치산부대가 주축이 된 혁명소비에트 조직됨. 소비에트 의장직.

1922년 10월 김규식이 총사령을 맡은 고려혁명군이 연해주지역 백계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마지막 전투에 참가

1922년 말 연해주를 탈출해 만주로 진입한 김규식은 안동현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 김좌진의 부대와 합류.

1923년 4월 하순, 영고탑에 있는 대종교당에서 연합총회를 개최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재건(자유시 참변 이후 해산당함)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영남반점(嶺南飯店)에서 결성된 고려혁명당에 김좌진과 함께 위원으로 참가

1929년 동포의 교육을 위해 노력

1931년 5월 10일, 사주를 받은 공산당원에게 피살.

추서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그와 함께 만주로 이사한 가족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로 고초를 겪었으나 2009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로소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았다.

비고

출처:나무위키[1], 성북아카이브[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