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金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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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김창집(金昌集)은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작가이다.

생애

출생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이며, 어머니는 현감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의 형이다. 명문대가(名文大家)의 장자(長子)로 인조 26년(1648년) 무자 10월 29일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현종 14년(1673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숙종 1년(1675년) 선친(先親)이 예송 논쟁으로 영암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과거응시를 미루고 있던 중 숙종 6년(1680년) 선친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특별히 제수 받아 관직에 나갔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숙종 10년(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37살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숙종 11년(1685년) 정언(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홍문록(弘文錄) 16명에 뽑히고, 도당(都堂)에서 뽑은 홍문록(弘文錄) 15인에 뽑혔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고 4월 9일 남인의 집중 공세로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함께 포천 영평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산중에 숨어 지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과 들끓이는 도둑들으로 인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을 중심으로 신임사화가 일어나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몽와집(夢窩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저서

아비를 사랑하듯 임금 사랑했으니 / 愛君如愛父
하늘 해가 내 붉은 맘 비춰주리라. / 天日照丹衷
선현께서 남기신 이 두 구절이 / 先賢此句語
슬프기가 고금에 한가지로다. / 悲絶古今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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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