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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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소개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시간은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마르셀 뒤샹, 예술가로서 살아오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며 나무위키, CC-BY-SA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 (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은 프랑스의 예술가로, 다다이즘 과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195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19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붙인 L.H.O.O.Q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wiki, CC-BY-SA

생애

루앙 근처의 브란빌 출신인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과 화가인 쟈크 비용의 아우이다. 처음에는 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되려고 하였으나 파리에 나와서 아카데미 쥐리앙을 다니는 가운데 화필을 잡게 되어 후기 인상파의 작풍에 접근해 갔다. 이윽고 분석적 퀴비슴에 관심을 쏟아 1912년에 유명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를 제작해 세상에서 일컫는 동시주의(同時主義)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서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뒤샹은 1914년에 아홉개의 동편(銅片)을 두장의 글라스에 끼운 ⟪아홉개의 수형(鑄型), 나쁜 남자들⟫을 발표하였고 1917년 뉴욕의 앙데 팡당 미술전에는 흰 변기를 보내어 확실히 반예술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보편적으로 낯익은 기성품에 새로운 시점(視點)을 제공한 것이고, '나는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개적인 사상의 소유주인 뒤샹은 이후 완전히 제작을 단념하여 버렸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피카비아나 만 레이와 더불어 추진한 반예술의 경향은 다다이즘의 선구로서 지금에 와서는 다다이즘의 부활에 새로운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41년에는 브루인과 뉴욕에서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을 열었고 1947년에도 파리의 국제 쉬르레알리슴 전시회에도 참가하였으나 그는 1968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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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자전거바퀴.jpg

플리커

예술가 마르셀 뒤샹
크기 1.3m x 64cm x 42cm
위치 이스라엘 박물관
재료 Metal wheel mounted
시대 다다이즘
1913년에 뒤샹은 기성품(ready-made)을 활용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박은 이 작품은 일상의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사물들을 엉뚱하게 결합시켜서 유용성을 제거한 대신, 새로운 예술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샘.jpg

[1]『공공누리 제3유형』]CC-BY-SA

예술가 마르셀 뒤샹
크기 61cm x 36cm x 48cm
장르 장소 특정적 미술
재료 세라믹, glazed ceramic
시대 다다이즘

출처: CC-BY


1차 세계대전 후인 1917년 4월 10일, 뒤샹은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샘 Fountain>을 출품한다. 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한 협회였다.
즉, 자기가 만든 협회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 독립미술가협회는 특이하게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뒤샹은 동네 철물점에서 남성용 변기를 하나 구매한 다음, 'R. Mutt' 란 가명으로 서명하고 출품했다. 당연히 이 작품은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당했으며,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도 그게 작품인줄 몰랐다. 이후 뒤샹은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에 'R. Mutt' 라는 무명의 작가를 옹호하는 척 하며 이 작품에 대한 글을 투고했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마르셀 뒤샹, <L.H.O.O.Q.>, 1919

L.H.O.O.Q.jpg

wikiart.org Public domain

예술가 마르셀 뒤샹
제작시기 1919년
시리즈 일부 Readymades of Marcel Duchamp
장르 초상, Portrait painting
시대 다다이즘
1919년에는 <L.H.O.O.Q>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밑의 L.H.O.O.Q 라는 제목은 프랑스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된다고 한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인 것이다. 앞서 <샘>이 산업사회의 기성물품들을 전혀 다른 예술적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면, <L.H.O.O.Q>는 이전 세대의 예술 전통을 모독하면서 이전 시대 예술작품들을 현대예술의 전혀 다른 맥락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신세대가 구세대와 세대차를 느끼는건 어느 세대에나 있던 일이지만, '옛날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우월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뒤샹의 <L.H.O.O.Q>은 진정한 모더니즘을 대표함과 동시에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참고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