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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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천도교, 불교에서 각 16명, 15명, 2명씩 참가했지만 교단차원에서 일본제국에 부역한 가톨릭 교인은 한 명도 없다.

내용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명단

이름 내용
손병희 천도교 측 수장. 1921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이승훈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1930년 작고. 33인 중 가장 늦게 풀려남.
한용운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에는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권동진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은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권병덕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3년 타계.
길선주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김병조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완규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도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전개. 1949년 타계.
김창준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 광복 후 공산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북한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6.25 전쟁은 대한민국이 북침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활동을 하였다.
나용환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나인협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박동완 개신교 측으로 3.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1941년 병사.
백용성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박준승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27년 병사.
신석구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신홍식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사망.
양전백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양한묵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19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오세창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1953년 사망.
오화영 감리회 목사.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유여대 목사로 3.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이갑성 개신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변절했다는 주장, 이에 더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1930년대까지는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그러나 40년대까지 변절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상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이명룡 개신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물산장려운동 참가, 언론 활동. 1956년 병사.
이종일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이종훈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이필주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42년 작고.
임예환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최성모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홍기조 홍경래의 직계후손[3]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홍병기 천도교 대표.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네트워크 그래프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민족 대표 33인 손병희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이승훈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한용운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권동진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권병덕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길선주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김완규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김창준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나용환 B는 A 소속이다
민족 대표 33인 나인협 B는 A 소속이다

평가

· 3.1만세운동을 이끌어내고 표현하게된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 되었다.

· 3.1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의 근거로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 대한민국 정부에 그 정신이 계승된다.

· 일제의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 독립선언서의 작성,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선 결과, 민족대표 33인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라는 한계가 있다.

· 이들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 행위로 변절한 자들이 있다는 데서 선명성에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