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193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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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생애

  •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반남 박씨 장손 집안의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덕분에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가서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 학창시절 담임선생으로 있었던 소설가 박노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같은 반에서 공부한 문인으로는 소설가 한말숙, 시인 김양식이 있으며 그들과 교분이 두터운 친구였다고 한다.
  •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 전집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구해 읽으며 문학과 관련된 꿈을 키웠다.
  •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달도 안 돼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그 뒤로 공부에 회의감을 느껴 학교를 나가지 않았지만 이후 서울대학교는 한국 문학계에 남긴 업적을 높이 사며 2006년에 박완서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 전쟁 후 어머니를 비롯해 올케와 연년생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떠맡게 되어 동화 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 8군 초상화부에 취직을 하였는데, 후에 등단작이 되는 「나목」의 영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 1953년 4월 21일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扈榮鎭)과 결혼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4녀가 태어났으며, 40세까지는 전업 주부로 살았다.
  •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을 통해 데뷔하였다. 처음 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 없이 한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써내서 공모에서도 한번만에 바로 당선됐다. 그 뒤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였다.
  •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80세로 선종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수상경력

수상 작품 년도
한국 문학 작가상 그 가을의 사흘 동안 1980년
제5회 이상 문학상 엄마의 말뚝 1981년
대한민국문학상 미망 1990년
제3회 이산 문학상 미망 1991년
제38회 현대 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년
제25회 동인 문학상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4년
제5회 대산 문학상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7년
보관 문화 훈장 1998년
제1회 황순원 문학상 그리움을 위하여 2001년
제16회 호암 예술상 그리움을 위하여 2006년

대표작품

제목 발표년도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6년
나목 1976년
창 밖은 봄 1977년
휘청거리는 오후 1977년
혼자 부르는 합창 1977년
도시의 흉년 1977년
목마른 계절 1978년
배반의 여름 1978년
꿈을 찍는 사진사 1979년
욕망의 응달 1979년
살아있는 날의 시작 1980년
이민가는 맷돌 1981년
도둑맞은 가난 1982년
오만과 몽상 1982년
엄마의 말뚝 1982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 1983년
인간의 꽃 1983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3년
서 있는 여자 1985년
꽃을 찾아서 1985년
유실 1988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990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년
한 말씀만 하소서 1994년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1995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년
울음소리 1996년
나의 아름다운 이웃 1996년
속삭임 1997년
가는 비, 이슬비 1997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 1998년
해산바가지 1999년
아저씨의 훈장 1999년
조그만 체험기 1999년
어떤 나들이 1999년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999년
아주 오래된 농담 2000년
그 남자네 집 2004년
환각의 나비 2006년
친절한 복희 씨 2007년

작품특징

  • 6·25 전쟁과 분단 문제에서 초래된 비극적 체험으로부터, 물질 중심주의 풍조와 여성 억압에 대한 현실 비판을 심화된 내면 의식으로 사회 현상과 연관해서 표현하고 있다.
  • 박완서의 작품은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며, 자신만의 문체와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하였다. 중산층의 꿈과 속물성까지도 예리하게 파해친 것이 바로 작품세계의 핵심이라는 평을 받았다.

박완서 작품과 성북구

박완서는 성북구 돈암동과 보문동에 거주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성북구를 문학배경으로 한 작품이 다수 존재한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살아있는 날의 소망(2015)

나는 사촌들과 함께 큰 소쿠리를 가지고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때 우리 집은 삼선교였는데 아리랑고개를 넘어 정릉까지는 걸어서 한참이었다. 더군다나 그때 정릉 숲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전시라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고 공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흉년2(2012)

…그때 이미 나는 순정이를 따라 정릉 개천가까지 와 있었다. 가뭄이 계속되는 한여름의 개천 물은 썩은 내를 풍기며 정지해 있었고, 비탈 동네 한가운데 드높은 장대 끝의 백기도 축 늘어진 채 정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 구역질이 가장 심하던 여름날, 정릉 집에서 본 기묘한 광경을 상기했다. 그때, 이 여자는 그 불구의 다리를 애처롭게 끌고, 아버지의 횡포에 가까운 무자비한 혹사에 노예처럼 순종했었다.… 나는 정릉 집에 갈 때 마다 내가 이들 모자에게 불쾌하고도 절대적인 특권을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애야,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로 시작해서 이 모에게 돈 20만 원을 거저주지 않고 꾸어준 걸 뉘우쳤고, 할머니가 정릉 새 절에 가실 때마다 돈을 많이 못 드린 걸 뉘우쳤고, 수희 언니를 돈을 흠뻑 들여서라도 대학에 못 보낸 걸 후회했고,…

…내일 일찍 정릉 새 절에 다녀오시도록 해야겠다. 무당 할멈, 아니지 참 보살님께 이게 무슨 재앙인지 여쭈어봐 가지고 불공을 드리든지 살풀일 하든지 하고 나서 일을 시작해도 시작해야 할까 보다.…

정릉 살 땐 그래도 엎으라지면 코 닿을 데 당신이 계 시겠거니 형님이 계시겠거니 그저 그거 하나만 믿고 허구 헌 날 하는 독수공방이 쓸쓸한지도 무서운지도 모르겠더니만…

박완서 전집(1993)

정릉 집 앞에 다다를 때 까지도 날은 밝지 않았다. 차마 그 시각에 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다시 연탄재가 쌓이기 시작하는 더럽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춥고 비참한 기분으로 방황했다. 날이 밝아 오는 것과 함께 하나 둘 구멍가게들이 문을...(p97)

그 남자네 집(2004)

성신여대돈암동에 있을 텐데? 나는 좀 놀란 소리로 물었다. 맞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동으로 나누어져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후배가 가르쳐 준 건 새 이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쪽 지리에 훤했다. 위치를 자세히 물어보니 성신여대성북경찰서 사이였다. 내 처녀 적의 마지막 집도 성신여고성북경찰서 사이에 있었다.…

80년대 초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가서 센 강을 보고 애걔걔 그 유명한 센 강이 겨우 안감내만 하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기억 속의 안감내는 개천치고는 넓은 시냇물이었다. 집만 나서면 개천 건너로 곧바로 성북경찰서의 음흉한 뒷모습과 거기 속한 너른 마당이 바라다보였다…

출처

디지털구리문화대전 박완서 홈페이지 성북구립도서관 성북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