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대사관로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성북구 대사관로는 원래 서울의 전통 부촌으로 성북동과 평창동을 으뜸으로 한다. 특히, 주한외국 대사관저가 위치한 성북구 성북동은 경제계 재벌들도 매우 선호하는 곳으로 현재 40여개 이상의 각국 대사관저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1970년대에는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 등 정치권 인사들이 주로 성북동에 살았다.
재계 인사들이 성북동에 모이기 시작한 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후인 1980년대 부터다. 당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등이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성북동에는 4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의 대사관, 대사관저가 소재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물론 성북동 주민들 또한 어떤 나라의 대사관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독일, 일본의 대사관저들을 시작으로 유럽연합과 독일 그리스 멕시코 아프가니스탄 캐나다 호주 등 광화문,청와대가 가깝고 뒤에는 북악산이 있고 서울성벽을 끼고 있어 자연환경도 뛰어나다.
대사 외에도 부대사는 물론 외교관들도 성북동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 많다.

위치

지도를 불러오는 중...


[한성대 입구역에서 가는 법] 한성대입구역 출발 ☞ 삼선교.성북문화원 정류장까지 이동 ☞ 성북02 버스 승차 ☞ 한국가구박물관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 성북구 대사관로까지 걷기 (이동시간 약 11분)

소개


성북동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성북로 길 양옆 가로등 밑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태극기와 함께 걸려있다.
이 국기들은 성북동에 소재한 주한 외국 대사관저들의 국기들로, 성북구청이 한국과 이들 나라와의 우호 증진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내걸고 있다.
국기들은 성북로의 끝 우정의 공원까지 이어지는데, 2007년에 조성된 이 공원 역시 성북구가 이들 국가와의 우호 증진을 위해 조상한 장소이다.
이외에도 성북구청은 매년 개최하는 라틴아메리카 축제, 아프리카 축제, 유러피안 축제 등 세계문화축제와 대사관로 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등을 통해 성북동 소재 주한 대사관저 및 성북동 거주 외국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지역의 문화자원으로 삼아 역사문화지구 성북동 알리기를 하고있다.


성북동은 용산구 이태원동, 한남동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외국 공관지역이다. 성북동의 주한 대사관저들은 대체로 삼청터널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대사관로 주변 330번지 일대와 길상사와 성락원 주변 언덕 지대에 흩어져 있다.
대사관저는 주한 외국 대사와 그 가족들의 사적 거주공간이면서 각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크고 작은 외교 관련 행사들을 위한 공적 기능을 가진 특별한 장소이다.


성북동이 주한 대사관저 부지로 주목받은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1972년에 일본 대사관저가 지금의 자리에 신축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서독(현 독일) 대사관저가 들어왔다.
이후로 꾸준히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들어와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데, 성북동에 이렇게 많은 대사관저들이 들어선 이유는 1960년대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는 서울의 도시 변천과 깊은 연관이 있다.


6.25전쟁 이후 서울로 인구가 빠르게 유입되었는데, 서울은 극심한 주택난에 봉착했고, 주택 건설은 국가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해결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는 대대적인 주택건설정책을 수립하고, 서울 곳곳에서 택지조성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주거 확장 사업 속에는 외국인 대상 임대 주택 건설 사업도 끼여있었다.
1950년대에 서울에는 각국 외교관, 주한미군 장병들과 그들의 가족 등 수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거주지는 용산구 이태원동과 한남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요에 모자라는 주택 수와 낙후된 주거환경 속에서 주한 외국인들 역시 안정된 집을 찾기 어려웠다.
이승만 정부는 주한 외국인들의 주거 문제를 외교·안보상 국익 확보를 위한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기존 외국인 거주지였던 이태원과 한남동에 새로이 외인주택단지를 건설해 분양했다.


1960년대 중반이 되자 서울에 사는 주한 외국인의 수는 크게 늘었다. 이는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외교 다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국제 교류가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외국인을 위한 더 많은 주택 건설이 필요한 시점에서 정부는 외인아파트를 지어 주택공급물량을 대규모로 늘리는 한편 기존에 대한주택공사가 도맡아 추진했던 외인 주택건설 사업을 일부 민간 기업에 맡겨 시행하도록 했다.
서울시는 1967년 용산구를 벗어나 성북구 성북동에 외인주택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고 대교산업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1967년 6월말에 착공한 주택단지는 1969년 말 완공됐다. 이것이 오늘날 성북동 330번지 '대교단지'라고 부르는 주택단지와 성북아파트이다.
비슷한 시기 대교단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좀 더 작은 규모의 외인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바로 오늘날 '성락원마을'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대교산업은 삼청터널 공사도 맡아서 시행했다. 성북동은 도심과 직선거리상 가깝다는 위치상의 장점이 있지만 주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외교관들에게는 좁은 성북로를 빠져나와 혜화로터리와 율곡로를 통해 도심에 진입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 교통 여건은 좋지 않았고, 당장에 성북동 외인주택의 수익성 확보가 문제로 떠올랐다.
북악산을 뚫어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터널의 개통은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대안이었다. 1970년 12월 개통한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시청까지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게 해주었다.


1970년대 초 삼청터널의 개통으로 외인주택단지의 제반 여건이 갖추어짐에 따라 기존 한남동과 이태원 등지에 있던 대사관저들 중 일부가 성북동으로 이전하였다. 새롭게 한국과 수교를 맺은 국가들도 대사관저를 성북동에 짓거나 빌려서 들어왔다.
1972년 일본대사관저가 옮겨오면서 대사관저로서는 처음 성북동에 발을 들였다. 1976년 10월에는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서독 대사관저가 새로 지은 대사관저로 옮겨왔다.
이후 호주, 캐나다, 터키, 스웨덴 등 각국 대사관저가 차례로 성북동에 터를 잡았고, 이와 함께 내국인들 중에서도 유수 재벌기업의 회장들과 재력가들도 성북동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성북동 외인주택단지는 1980년을 전후한 시기 신흥 고급주택단지로 변모했고, 부촌으로 이름이 났다.


성북구 소재 주한대사관저 현황
아시아 중국, 일본, 네팔(대사관), 방글라데시, 싱가포르, 스리랑카, 카자흐스탄, 브루나이,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요르단,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유럽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덴마크,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스웨덴, 폴란드, 노르웨이, 유럽연합
아프리카 잠비아, 나이지리아, 튀니지, 탄자니아, 수단,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에티오피아, 알제리, 앙골라(대사관)
라틴아메리카 멕시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오세아니아 호주, 파푸아뉴기니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