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國歌)

초기의 애국가 (舊애국가)

1. 국가(國歌)의 필요성

애국창가 악보집에 실린 전국 곳곳의 초기 애국가 중 하나이다. 저작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공공누리 제1유형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 강국들과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화를 시작한다. 이에 더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 의지가 점차 심해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국애족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애국애족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표출되었다. 또한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때 당시 조선은 국가(國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국의 국가가 아닌 미국의 민요가 조약식에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국가의 권위를 위하여 국가(國歌)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는 서양의 음악을 배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작곡하고 서양식 군악대를 지휘할 서양 음악가를 거액에 영입하게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2. 최초의 국가(國歌) : 대한제국 애국가

프란츠 에케르트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컨텐츠 양도, 배포, 2차가공 제한

그리하여 대한제국 서양식 군악대의 지휘자 겸 국가(國歌) 작곡가로 초빙된 사람이 독일 제국의 해군 군악대 군무원(작곡가) 출신인 프란츠 에케르트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국악(전통 음악)을 최대한 살려서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 결과물도 그러한 노력이 반영되었다. 공식 악보에 쓰인 독일어 해설에 따르면 '한국적 모티브를 본딴 대한제국 국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에케르트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손자 대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음악계를 지원하며 생을 마쳤고,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1902년 8월 15일 완성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9월 9일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정식으로 국가(國歌)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1907년 순종 황제 즉위식에서 마지막으로 연주되었고, 1909년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애국 창가 단속으로 인해 금지곡이 되었다. 또한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이후에는 국가(國歌)가 기미가요로 대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첫 연주부터 공식적인 마지막 연주까지 5년동안만 사용된 비운의 국가이다. 이렇게 작곡된 시기도 어두운 시기였던데다가 음도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처량한 분위기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망국의 한이 느껴진다는 평도 있다. 또한 가사의 내용이 일반 양민들이 외워 따라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웠고 이 때문에 국가(國歌)로써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다. 최초의 애국가인만큼, 광복 이후에도 쓰일 수도 있었지만 대한제국을 계승한 나라가 건국된 것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후에는 국가(國歌)로 채택되지 않았다. [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2.1. 대한제국 애국가 음원[1]

[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컨텐츠 양도, 배포, 2차가공 제한 ]

2.2.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의 표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컨텐츠 양도, 배포, 2차가공 제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의 첫 장.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컨텐츠 양도, 배포, 2차가공 제한
현대 언어로 변환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컨텐츠 양도, 배포, 2차가공 제한








































































현대의 애국가 (新애국가)

1. 탄생의 배경

현재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저작자 : 위키피디아(CC BY-NC-SA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애국가가 애국 창가로 분류되어 공식적으로 금지당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애국가가 다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널리 불려지던 애국가는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여 부르던 애국가였다.[2] 이 애국가는 당시 우후죽순 쏟아지던 다양한 애국가들에 비해 가장 많이 불렸고 3.1운동 당시에도 이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도 있다.(The Truth about Korea, C.W.Kendall, 1931년). 이 애국가의 후렴에 나오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라는 가사가 현재 애국가의 가사에도 이어져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널리 불려진 애국가였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는 이 노래를 국가(國歌) 대신으로 계승하기도 하였다.

이에 안익태는 1935년, 감동적이고 박력있는 애국가의 가사에 비해 다른 나라의 이별 민요곡을 붙여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애국가 작곡에 나섰다. 안익태가 작곡한 현재의 애국가는 이후 1940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하게 되고 1941년 광복군 결성식에서 불려진 이후 일제의 탄압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주 등의 해외에서 적극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로 들어와 한국 본토에도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에도 공식적으로 연주되어 현재까지 대한민국 국가(國歌)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법률 상 실제로 국가(國歌)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국화가 무궁화이고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처럼 관습적인 상징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관습 헌법의 개념으로 국가(國歌)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애국가의 저작권은 2005년 3월 15일까지 안익태에게 있었다. 하지만 2005년 3월 15일, 그의 아내인 로리타 안 여사가 대한민국에서 애국가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주어 대한민국 정부에 양도하였고 이후부터 현재도 애국가의 저작권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 [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2. 논란

2.1. 작사가 논란

아직까지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윤치호나 안창호, 혹은 김인식이 작사했다는 의견 등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윤치호 작사설은 여러 가지의 증거들이 존재하지만 이에 비해 안창호 작사설 등 다른 의견들은 증언 수준의 증거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친일파로 유명한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의견이 학계에서는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친일파가 애국가의 가사를 작사했다는 의견이 힘을 얻자 임시정부 내에서도 개작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김구가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 라고 말하여 논란을 일축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2.2. 작곡가 논란

작곡가인 안익태 역시 친일 행동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실제로 안익태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적이 없으며 대한제국, 일본, 결혼 이후 취득한 에스파냐의 국적만을 가졌었고 만주군 창설식 당시 지휘를 하는 등의 친일 행색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國歌)를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에 논란이 그리 커지지 않았다.[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2.3. 종교 논란

애국가의 가사 중 하느님이 보우하사 라는 부분에 대해 일부 종교에서만 인정하는 하느님이 등장하면서 종교적인 중립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하느님은 기독교(개신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출처 : 나무위키(CC BY-NC-SA)]


3. 화제의 애국가

이 파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 중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킨 애국가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3.1. YB의 애국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가로 사용하기 위해 YB가 발매한 앨범이다. 기존의 애국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도 거리 응원의 흥겨움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애국가를 편곡해 만든 곡이어서 인기도 상당히 많았다.

[저작자 : HANKOOK NORE, 유튜브 영상. CC BY]


3.2. 소향의 애국가

2012년 한국의 야구 리그인 팔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부른 것이다. 당시 올스타전 시작 전 개막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인데 소향의 성량과 고음이 더해져 보다 경건하고 울림있는 역대급 애국가였다는 평가가 많다. 일각에서는 처음 들어가는 음을 잘못하여 높게 잡아 이러한 역대급 무대가 나왔다는 의견도 있다.

[저작자 : IKA MUSUME, 유튜브 영상. CC BY]


3.3. 한미연합사령관 빈센트 브룩스의 애국가

2017년 국군의 날 행사 당시 행사에 참여한 한미연합사령관 빈센트 브룩스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포착되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참고로 당시 국군의 날 행사에서 브룩스 사령관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작자 : YTN NEWS, 유튜브 영상. CC BY]


4. 애국가의 역사 한눈에 보기

시간이 많지 않아 위의 글을 모두 읽을 수 없을 때는 이 영상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저작자 : EBSCulture, 유튜브 영상. CC BY]


1.5.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5%A0%EA%B5%AD%EA%B0%80#s-7 (CC BY-NC-SA)

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 (CC BY)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79,04760000,34&pageNo=5_2_1_0#, (CC BY)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_kdcd=&s_ctcd=&ccbaKdcd=79&ccbaAsno=04750000&ccbaCtcd=34&ccbaCpno=4413404750000&region=&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ccbaCndt=&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cbaLcto=&ccbaGcode=&ccbaBcode=&ccbaMcode=&culPageNo=1&returnUrl=# (CC BY)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8&cp_code=cp0443&index_id=cp04432191&content_id=cp044321910001&search_left_menu=3 (CC BY-NC-ND)

공유마당 https://gongu.copyright.or.kr/gongu/main/main.do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