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오산학교


소개

1900년대 초반 대중의 지식 수준 향상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며, 일제 민족말살정책에 대해 민족을 지키고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을 건학이념으로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이다. 국권회복이라는 설립 취지였기에, 일제의 감시와 수난의 대상이기도 했다. 다양한 과목 개설로 보다 넓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에 걸맞는 교직 일동의 헌신적인 태도가 있었다. 오산학교는 교육구국운동의 지표 중 하나이고, 국권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건재했으며, 민족 정신을 양육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학교이다.

설립 초기 운영 방식(1907~1910)

과목은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다 있었다. 수업 수준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사이였고, 민족 정신 양성이 건학 이념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역사 과목을 가장 중시했다. 전국 각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많았으며,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이 심해 이승훈이 자신의 토지를 전부 팔아 학교의 재산에 기부했다.

기독교 교육 강조기(1910~1919)

1910년 12월 교내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남강의 뒤를 이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성경이 교과목 내에 개설되었고 남강이 조회시간마다 줄곧 설교와 기도를 하고는 했다. 교육정신으로 기독교 사상이 강조되었다. 단순히 기독교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기독교정신이 동등하게 중시되던 시기였다.

3.1 운동 이후 변화(1919~1934)

3.1 운동 이후 일제의 보복이 먼저 향한 곳은 민족 독립 운동의 진원지인 오산학교였고, 3월 31일 일제 헌병들이 학교와 교회에 방화를 하였다. 교장 조만식은 구금되고, 몇몇 교사들은 경찰에게 구속되었다. 화재와 재정 부족으로 폐교의 위험에 처하자 김기홍과 졸업생, 사회유지의 협력으로 기부금이 모여 재건이 성공하게 된다.

1934년 대화재 이후(1934~1942)

1934년 화재로 본관이 완전히 소진되었으나 모금 운동을 통해 화재 후 2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1941년에는 모든 건물과 시설 등이 최신식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참여인물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교사로 참여했다.

역사

년도 내용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개교.
1910년 교내에 교회 설립
1919년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불리며 소각당함.
1923년 이승훈 출옥후 재건.
1934년 대화재로 본관 소진.
1934년 본관 재건축.
1942년 일본인 교장으로 교체.
1950년 부산으로 교사 옮김.
1956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

의의

오산학교는 당시의 교육구국운동 일환으로 설립자 남강의 강한 집념아래 이루어졌으며 오산학교의 설립과 발전에는 당시의 평안도의 지역적 특수성과 당시 서민의식의 성장이 큰 영향을 주었다.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이라는 기치아래 남강을 비롯하여 여러 교직원들이 일심 단결하여 헌신적인 교육애를 펼쳤다고 하겠는데 당시의 애국적인 지식인이면 한 번쯤 오산학교를 거쳐갔으며, 오산학교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그 재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으며 다른 사학과는 달리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건재하였다.

오산학교는 다양한 교육 경험을 제공하였다. 실험실습을 중시한 과학교육, 손으로 직접 일구는 체험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시설도 훌륭하여 스팀으로 난방을 하였고 수영장도 있었으며 넓은 운동장을 갖고 있었다. 기숙사와 함께 목욕탕이 있어 납부금에 목욕비가 포함되어 위생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최신식 시설에서 교육을 시키는 데서 동질감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교직원은 물론 안창호, 이승만같은 애국지사들의 강연을 수시로 가졌고, 예배와 성경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정신교육, 군사훈련을 방불케하는 강건한 신체 단련 교육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전사로서의 바탕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오산학교는 비교적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이 재학하였으며 비교적 평균 연령이 높은 관계로 학생들의 이해는 빨랐으며 헌법대의, 법학통론, 법제경제, 국가학 등 현대 교육과정 수준의 강의가 이루어졌고 민족사학인 만큼 조선어는 끝가지 가르쳐졌으며 역사교재도 주로 독립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모든 교육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국권회복을 최종목표로 하였다.

오산학교는 입학하는 구성원이 다양하였지만 학교의 학생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이 학교에 다닌다는 자긍심을 가졌다. 오산학교의 민족주의 교육은 당시의 학생에게 동질감을 주었고, 권위적인 분위기보다는 학생 존중의 입장에서의 학교 분위기가 더욱 학교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했다.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였던 관계로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이 몰려왔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사에 대한 파격적인 처우를 하여 훌륭한 교사의 부임을 유도하였었다.

오산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어서 학교교육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준 학교의 사회화과정을 형성했다. 즉 오산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영향을 준 학교의 사회화과정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긴 학교였다. 이 학교는 지역사회교육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오산학교의 졸업생들은 여러 분야로 진출하여 독립운동가, 목회자, 건축가, 언론인, 문화예술인, 의사 등과 같은 훌륭한 인재가 많았다. 그러나, 오산학교에서는 특히 민족교육 실천을 위한 기초적인 직업인으로서 초등학교 교사의 역할을 중시한 데서 많은 교육자를 배출하였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 는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많았다.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한국인, 바람직한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초등사회과 교육 특히 역사교육의 목표와 견주어 볼 때 그 이념이 거의 일치하는 점을 보여 주었다.

오산학교는 민중을 교육하고 자립 자존의 독립 정신과 참과 사랑이 어우러진 기독 정신이 융합된 당 시대가 요구하는 절실한 정신, 덕목을 그 교육내용으로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투철한 민족 정신이 있었기에 오래도록 학교가 존속되어 민족을 위한 인재양성을 할 수 있었다.

관련 영상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산학교 이광수 A에서 B가 일했었다.
오산학교 이승훈 A를 B가 설립했다.
오산학교 김소월 A를 B가 졸업했다.
오산학교 기독교사상 A가 B를 강조했다.
오산학교 일제 A가 B에게 압박당했다.

참고문헌

'오산학교의 교육이념과 실천 연구-정주시대의 남강, 교직원,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분석-'/ 이경림 /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