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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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 (1545- 1598)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계속된 왜군과의 싸움에서 전투에서 패배를 하지않고 전승을 하며 나라를 구하게 된다.
당시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전술로 싸우며 군지휘에 특출난 기량을 보이고 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는 현재 국보와 유네스코에 등재되있을 만큼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워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지만 주변의 모함과 시기로 정유년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후에 원균이 죽자 복직하여 싸워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1598년 12월 16일 도요토미가 죽고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큰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지만 여기서 이순신은 왜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생애

유년기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인종 1년에 한성부 건천동에서 4형제 중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고려 시대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관의 양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그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이순신의 가문은 증조부인 이거(李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지만, 할아버지인 평시성 봉사직을 맡은 이백록(李百祿)이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내다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인해 화를 당한 뒤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어릴 적 이순신은 본가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였으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이순신은 어릴 적 부터 용감하고 활을 잘쏘며 말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후에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묘사를 하며 어릴 적부터 성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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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1가 을지로18길 25-2 이순신 장군 생가터 ​Google Map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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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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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의 시작

22세가 되던 해에 늦은 나이로 무예를 시작하여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지면서 왼발을 다쳐 실격하게 된다.
후에 무예를 계속 닦으며 32세에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 직으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면서 무관으로서 시작을 하였다. 이어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역임하고, 1586년(선조 19년)에는 사복시 주부(종 6품)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에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추도에 살고있던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전투를 하였지만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녹둔도 전투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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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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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백의종군

이순신은 일생에 총 두번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된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북병사 이일이 조정에 이경록과 함께 녹둔도 전투에 참가한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하지만 조정에는 당시에 녹둔도 전투에 대한 대략적인 전말이 전해져 있어 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 1월에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여진족 토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받아 사면되어 복직되었다.

임진왜란 전

백의종군에서 복직하여 1589년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에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1591년 47세가 되던 해에 정3품 당상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는 당시에도 매우 속도의 승진인데 이것은 당시 왜군과의 전쟁이 임박하여 유능하고 실전 경험이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선조의 특례였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이미 유망한 장수로 인식하고 있는것을 보여준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이순신은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을 주기지로 삼아 판옥선과 거북선 등 함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을 확보하며 왜침에 대비하여 군사훈련들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며 수군을 강화하였다.

거북선건조.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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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사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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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이틀 뒤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옥포해전

5월 4일 새벽, 최초의 출격으로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도합 85척의 선단이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나다 도도타카토라가 이끄는 적선26척을 만나 전멸시켜 임진왜란 첫 승리를 해냈다.

사천해전

5월 29일, 노량 앞바다에서 원균으로부터 사천에 왜군이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사천에 있던 적선 12여 척을 격멸시킨다. 당시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왜군이 쏜 조총으로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또, 이 전투는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이다.

한산도대첩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에서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에 이순신은 3차 출전을 한다. 그리고 7월 8일 임진왜란 3대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학인진을 펼친채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후 9월 1일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계속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재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을 어렵게 하였다. 이런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593년 이후 왜군들이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 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사이가 안좋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가게 된다.
이후 전쟁이 고착화 되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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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통제사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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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째 백의종군

정유년(1597년)에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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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관리소 ],
죄인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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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아 있는 전선이 13척에 불과했다. 9월 16일 진도 명량해협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며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었다. 이로인해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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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by 이기현
충청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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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이듬해 1598년(선조 31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순신은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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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by 이기현
충청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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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후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년) 다시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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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이충무공묘 (牙山 李忠武公墓) by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국가문화유산 포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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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 Google Map Public Domain

난중일기

전란 중에 쓴 일기 국보 제 76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의 정확한 명칭은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으로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총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중일기는 본래 연도별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1권 임진일기(壬辰日記):27매, 2권 계사일기(癸巳日記) : 30매, 3권 갑오일기(甲午日記) : 52매, 4권 병신일기(丙申日記) : 41매, 5권 정유일기(丁酉日記) : 27매, 6권 속정유일기(續丁酉日記) : 20매, 7권무술일기(戊戌日記)로 구성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주로 당일의 기상 변화, 군무 내용,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걱정, 가족에 대한 그리움, 유성룡에 대한 걱정 등 사적인 정서도 적지 않다. 각각의 일기는 대체로 요점만을 적은 간략한 기록이며 내용이 짧으면 날씨만 기재된 날도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5] 정유년(1597년) 일기에서 그런 부분이 두드러진다.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서간첩는 이순신의 편지들을 모아 만든 서간집이다.


임진장초는 표지에 '임진장초(壬辰狀草)'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만력이십년(萬曆 20年)'이라고 써 있으며, 지면(紙面)에는 여러 곳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全羅左道水軍節度使印)'이라는 주인(朱印)이 찍혀 있다.


관련자료

거북선

[전남 여수] 여수 이순신광장 전라좌수영거북선(4K)에 들어가봤어? | 레알트립 Youtube-BY 레알트립 Real Trip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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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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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충무사 ​Google Map Public Domain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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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忠烈祠)- 현충사관리소- 공공누리 제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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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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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에 의해 작성된 본 문서이순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 (CC BY-NC-SA)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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