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동한규설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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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7호

시대

  • 1890년대 건립, 1980년 이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855번지 2호

개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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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 개관: 평일 오전9시 ~ 오후5시
  • 휴관: 주말,공휴일

오시는 길

1.한성대입구역→성신여대입구역→1116(지선 버스)→국민대후문정류장 하차

2.한성대입구역→성신여대입구역→북한산보국문역 하차

3.한성대입구역→153 길음 뉴타운(간선 버스)→청덕초교정류장 하차

역사

  • 장교동 한규설 가옥은 18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대한제국기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1848∼1930)이 살았던 곳이며 한규설 대감의 유택으로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 생활문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되었으며, 일제시기에는 교욱운동에 투신하였다. 원래 중구 장교동에 있던 집을 1980년 12월 20일 국민대학교로 옮겨 새로 지었는데, 이 때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 중문간 행랑채와 사잇담 등을 새로 지어 원형을 찾았다.
  • 한규설은 청주가 본관이며 어영대장 총융사(摠戎使) 한규직(韓圭稷)의 동생으로 무과(武科)에 급제. 포도대장, 의정부찬성을 역임하고 광무 9년(1905)에 의정부참점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시 극구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남작(男爵)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가 집을 지은 1890년대는 개화사상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때이며 ‘개량식한옥’의 기운이 태동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사랑채에 보일러 난방을 하고, 보일러 여열을 이용한 온실을 시설하는 새로운 시대성이 집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이건하면서 제외되어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교동 한규설 가옥 [長橋洞 韓圭卨 家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구조

  • 이 집에는 대문채,사랑채,안채,별채,행랑채,사당 등 여러 채가 있고 각각에 맞추어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사당마당 등 마당도 나뉘어 있다.
이는 채와 마당이 짝을 이루는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솟을대문

솟을대문11.png

  • 솟을대문 내부

대문채

솟을대문 양쪽.png

  •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작은 방들이 있는 대문채가 있다.

중문채

중문채.png

  • 대문채 안쪽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채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문채와 함께 마당이 있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안채

안채.png

  • 안채는 앞면 8칸으로 '-'자형 주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뒷편에 날개채를 달아내어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대청마루.png

  • 대청마루는 상당히 넓으며,제사를 비롯하여 집안의 큰 행사를 할 수 있는 규모이다.

날개채.png

  • 날개채는 부엌과 부엌에 딸린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앞 마당 1.png

  • 안채 앞 마당이다. 이 가옥은 건물마다 독립된 형태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채마당.png

  •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안채 마당이다.

별채

별채.png

  • 별채는 부엌,작은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독립된 주거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온돌방.png

  • 별채 대청마루와 양쪽에는 온돌방이 있다.

행랑채

행랑채.png

  • 행랑채는 앞면 5칸의 규모의 건물로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손님이나 하인이 머무는 공간이다.

사당과 행랑채의 앞마당.png

  • 행랑채와 사당의 앞마당이다.

사당과 행랑채의 넓은 마당.png

  • 안채 뒷편으로 행랑채와 사당은 넓은 마당이 있다. 사당 옆으로는 장독대가 있는데 상류층 저택이지만 장독대의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채

사랑채1.png

  •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형으로 보이는 건물이지만 뒷편에는 날개가 있어 실제로 'ㄱ'자형을 하고 있다.

사랑채 2.png

  • 겹치마를 사용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