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 인왕산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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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구간

소개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산에서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어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 구간 : 돈의문터~창의문
  • 거리 : 4.0km
  •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 24시간 개방(매주 월요일 휴무)
  •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돈의문 터-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암문-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교통편 안내

돈의문 터에서 출발하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준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서대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도보 3분을 이동하시면 도착할 수 있다.

인왕산 교통편.PNG

구간 주요지점

  • 돈의문 터

옛 돈의문.jpg 보이지 않는 문.gif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3월 6일 일제에 의해 경매를 하여 205원 50전의 가격으로 경성 염덕기(廉德基)에게 목재가 다 낙찰되어 팔려나갔고 석재는 도로의 개수에 사용하였고 고고학적으로 참고할 부속물들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하기로 하였다 전해짐.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西大門)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이 시기부터 돈의문이라는 원래 이름을 잃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1915년 6월 10일에는 마침내 돈의문의 남아 있던 홍예석까지 철거되면서 완전히 그 흔적이 사라지고 지금의 터만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둘러 소의문과 더불어 돈의문을 헐어 없앤 이면에는 1915년 9월부터 경복궁에서 열기로 한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 옛날 돈의문이 있던 자리에는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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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38년 일제 치하에서 금광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최장학이란 인물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 까지,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건물을 집무실과 숙소로 이용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 청사로 이용하였다. 경교장(京橋莊)이라는 이름은 백범이 근처 개울에 있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고쳐지은 것이라 한다. 백범이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 주둔 시설, 한국전쟁 종전이후 베트남 대사관 등으로 활용되고 1968년부터는 고려병원(1995년 강북성심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며 이 시기에 내외부가 병원으로 개조되면서 원형이 변형된 것이다. 이때부터 경교장을 보전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1990년대부터는 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로 지정, 2005년에는 사적 제 456호로 승격되었다. 그 이후 2010년 경교장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에는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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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위치해 있으며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가 살던 집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 과 같이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됐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될 가치가 높다. 2004년 9월 4일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 사직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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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터널로 광화문을 조금 지나서 인왕산 자락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 도성 성벽은 바로 이 사직터널부근에서 끊어졌다가 터널 남쪽 주택가 골목에서 다시 이어진다. 터널 북쪽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사직단이 위치해 있어서 사직터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 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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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서울특파원을 겸하며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2017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는 저소득층 12세대가 거주해 오다가 퇴거하고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인왕산 순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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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38m의 인왕산(仁王山)은 한양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서북쪽에서 북쪽을 따라 내려오는 산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산, 중종 이후로는 필운산으로 불렸다. 인왕산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터로 잡고 인왕산을 강력한 진산후보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시 여겼다. 비록 정도전의 반대에 한양도성의 진산이 되지는 못했지만 백악산의 서편에 위치한 우백호가 되었으니 그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할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한양도성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전역이 한눈에 들어와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인왕산과 관련된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대표작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관념적인 풍경이 아닌 실제 풍경을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평가 된다. 검은 먹을 사용해 비온 뒤 인왕산의 기암괴석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바위 틈새를 흰 선으로 표현해 사실감을 더했다. 인왕제색도는 1984년에 국보 제 216호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높이 사고 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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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위치해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해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는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 최규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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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의 동상이 창의문 앞 길가에 위치해 있다. 1.21사태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최규식 동상은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백악이 각각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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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은 도성의 서북쪽을 지키는 문으로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다. 창의문도 다른 도성문들처럼 임진왜란 당시 문루가 없어지고 망가져 있었다. 영조 17년(1741년) 1월에 창의문의 홍예석 깨진 것과 문비를 고치고 문루를 짓는 공사가 진행 되었다. 인조반정 때에는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간 지점에는 북단이라고 하는 제단이 있는데 이는 기우제나 제사를 받지 못하는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군사화가 되고 또 제의 기능이 발전하면서 북교는 임금이 친림하여 쏘기를 하거나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 되었다. 그럴 때 창의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