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문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생애

1930년대에 조선일보 학예부장과 월간 『조광(朝光)』 주간을 거치는 한편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朝鮮文典要領)을 현대평론(現代評論)에 발표한 이후, 국어 연구에 정진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당시 서울 교외의 한촌(寒村)이었던 창동에 은거하였다. 당시 한 마을에 살았던 일사(一簑) 방종현(方鍾鉉)과 교분을 맺어 국어학 연구에 더욱 전념한 후
8·15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직을 수행하면서 『정음발달사(正音發達史)』(서울신문사) 상·하권을,1947년 『조선문법연구(朝鮮文法硏究)』(서울신문사)를 펴내는 한편 1946년에는
『조선문화총화(朝鮮文化叢話)』(정음사)를 펴내기도 했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대표였던 부친을 따라 입북한 뒤, 그대로 잔류하여 주로 국어학연구와 문화활동에 주력하였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부교수, 1954년 동대학 교수, 1957년 과학원어학연구소소장,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 1964년 사회과학원부원장,
1972년·77년 최고인민회의부의장 겸 상설회의부의장, 1980년 당중앙위원, 1981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장, 사회과학원원장,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도 국어학분야에 관한 여러 업적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1949년에 전몽수(田蒙秀)와 함께 『훈민정음역해(訓民正音譯解)』를 평양 조선어문연구회에서 펴낸 것을 위시하여 『향가해석(鄕歌解釋)』(평양:조선국과학원, 1956),
『리두연구(吏讀硏究)』(평양:조선국과학원, 1957), 『조선어력서문법(朝鮮語歷史文法)』(평양:사회과학원, 1966)등 단행본과 「삼국시대의 조선한자음과 우리의 어음」(『조선어문』 1949년 4호),
「현대 조선어의 장음과 고음」(과학원학보 1955년 7호)을 발표하였다. 이어 「조선어의 기본어휘와 어휘구성에서 고유어휘와 한자어휘가 가지는 관계」(『조선어문』 1, 1956, 2),
「조선어에서 구개음화현상의 력사적 발달」(『조선어문』 1957년 1호), 「‘정음’자에 반영된 15세기의 어음현상」(『조선어문』 1957년 3호), 「명사와 술어나 규정어로 쓰일 경우 나타나는 ‘이’의 본질」(『조선어문』 1949년 4호),
「조선어와 몽고어와의 관계」(『조선어문』 1959년 6호), 「조선어 문장론에 대한 나의 연구방향」(『조선어문』 1959년 3호), 「조선어 한자어휘이 문제」(『조선어학』 1961년 4호) 등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번역본 400권)을 총괄하였고, 『이순신장군전집』(1955), 『대동야승선집』(1958), 『박지원작품선집』(1960), 『패설작품선집』 1·2(1960) 등을 번역하였으며, 상당수의 한문전문가를 양성하기도 했다.

생가

지도를 불러오는 중...

비고

출처: 성북아카이브[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