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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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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종전평화운동가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앞둔 1909년에는 서천군 재무주사로 근무하던 중 망명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공금을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br/>
 
독립운동가이자 종전평화운동가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앞둔 1909년에는 서천군 재무주사로 근무하던 중 망명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공금을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br/>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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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http://hwiki.eumstory.co.kr/index.php/%EC%8B%A0%EA%B0%84%ED%9A%8C]에 참여'''하였다.<br/>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성북동 260번지)에 머무르면서 북한 당국자와 이승만 정부에 종전을 호소했다.<br/>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성북동 260번지)에 머무르면서 북한 당국자와 이승만 정부에 종전을 호소했다.<br/>
 
미군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가서 종전을 호소했으나 양쪽 정부 모두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br/>
 
미군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가서 종전을 호소했으나 양쪽 정부 모두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br/>

2021년 12월 16일 (목) 01:34 판






개요

독립운동가이자 종전평화운동가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앞둔 1909년에는 서천군 재무주사로 근무하던 중 망명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공금을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1]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성북동 260번지)에 머무르면서 북한 당국자와 이승만 정부에 종전을 호소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가서 종전을 호소했으나 양쪽 정부 모두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
1950년에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에는 주소가 돈암동 458-392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생애

1919년 최익환 대동단 조직 후 의친왕 이강 망명 주도 1927년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용운, 최익환, 조헌영 등 신간회 활동 참여 1928년 최익환 만주로 망명 후 광복단 활동 1951년 최익환 휴전협상의 비밀요원으로 미8군에 의해 평양으로 밀파 후 억류

집터

최익환 집터.jpg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돈암동 458-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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