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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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독립운동가이자 종전평화운동가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앞둔 1909년에는 서천군 재무주사로 근무하던 중 망명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공금을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1]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2]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성북동 260번지)에 머무르면서 북한 당국자와 이승만 정부에 종전을 호소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가서 종전을 호소했으나 양쪽 정부 모두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1950년에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에는 주소가 돈암동 458-392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생애

1904년 동학(東學)에 입교,일진회(一進會)에 가입.

1907년 7월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를 거쳐 1908년 충남 서천군 재무주사를 지냄.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로 재직 중에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활동했던 과오를 반성, 3,000여 원을 탈취하여 국외로 망명하려다가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감형되어 5년 8개월간 옥고

1915년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의 기회만를 엿봄.

1917년부터 세계의 정세가 급변하자 1918년 봄 다시 서울로 복귀.

1919년 3월말 대동단(大同團)을 조직

1919년 최익환 대동단 조직 후 의친왕 이강 망명 주도

1926년 10월 대동단의 동지와 함께 각 계급을 망라한 민족적 유일기관으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조직, 상무위원에 선임.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 규칙심사위원 및 출판부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

1928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단(光復團)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귀국하여 1년간 경찰에 구금

1944년 대고려재건당(大高麗再建黨)을 조직하려다가 체포

1945년 다시 인민정치당을 조직하려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

1945년 광복후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에 피선

1946년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 동 대표의 자격으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에 피선,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임.

1950년 6·25전쟁 중에는 휴전협상을 위해 애씀

1951년 최익환 휴전협상의 비밀요원으로 미8군에 의해 평양으로 밀파 후 억류

1957년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의 통제위원장으로 활동.

1959년 7월 21일 동대문구 돈암동 자택에서 서거

생가(집터)

최익환 집터.jpg
참고:주거지[3]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돈암동 458-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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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출처:성북아카이브[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성북마을발견[6],주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