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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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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19:23 판
홍범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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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 홍범식 |
한자 | 洪範植 |
생몰년 | 1871~1910 |
출생지 | 충북 괴산 |
직업 | 독립운동가 |
학력 | 최종출신학교 전공명, 학위명(학사, 석사, 박사 등) |
활동분야 | 활동분야 |
관련단체 | 관련단체명 |
생애
1987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여러 학문을 탐독하며 1888년엔 진사시에 합격,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역임하였다.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업적
관련항목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