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페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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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파일:이육사 생가(원천동).png||height=600|섬네일|왼쪽|이육사의 원천동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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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잉글랜드 노퍽에서 출생하여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 때 활약하였다. 영국의 퀘이커교도인 코르셋 제조업자 가정에서 태어나 13세까지는 학교에 다녔으나 가난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정치와 사회제도의 모순을 체득하였다. 런던에서 만난 벤자민 프랭클린의 소개로 1774년 10월 필라델피아로 이주, 1776년 1월 《상식론》(Common Sense)을 출판하여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큰 영향을 끼쳤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N.그린의 부관으로 종군하는 한편, 《위기론》(The Crisis, 1776∼1783)을 간행,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라고 하여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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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쓴 책으로도 이미 영향이 컸다. 1791년 《인간의 권리》(Rights of Men) 제1부를 쓰고 이듬해 런던에서 제2부를 썼으나, 반란 선동이란 죄명을 쓰게 되어 프랑스로 피신하여 의원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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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중에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 제1부(1794) ·제2부(1796)를 썼다. 그 책으로 자신이 -신은 있지만 인간과 교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는 가짜이고, 인간이 신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드러나서,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구속되어 있는 점을 이용해, 지배계급이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키기 위해 '무신론'이라는 이른바 '죄'를 만들어 씌웠다. 그 수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고 토마스에게도 예외 아니었다. 결국 나머지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손가락질 받았다.  
안동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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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도 지난날의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추악한 무신론자"로서 비난을 받았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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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론적 입장[출처 필요]에서 쓴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 제1부(1794) ·제2부(1796)가 무신론이라는 오해[출처 필요]를 받게 되어- 에 대하여. 이신론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종교를 인정하는 건 말이 안된다. 유럽과 아메리카 기독교인은 당연시 이신론도 비난한다. 무신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신론 만으로도 무지하고 비논리적인 종교계의 배척을 받게된다. '무신론이라는 오해'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게 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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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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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이후 잠시 정치에서 물러나 있던 페인은 1787년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790년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자 이에 반박해 1791년과 1792년 두 차례에 걸쳐 《인권》을 발표했다. 프랑스혁명을 옹호하고 영국인들에게 공화국을 세울 것을 호소한 이 글로 인해 페인은 영국에서 반역자로 몰려 법익을 박탈당하고 가까스로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후 프랑스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혁명세력에 동참해 활동하다가, 루이 16세의 처형을 반대한 이유로 룩셈부르크 감옥에 투옥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석방되었다.
1927년 장진홍의거에 연루되어 붙잡혔다가 풀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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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월 대구격문사건으로 붙잡혔다가 3월에 풀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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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페인은 제퍼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너무도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그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질시를 받았다. 결국 페인은 과거 독립혁명의 영웅이 아니라 혐오스런 무신론자로 배척당하다가 1809년 빈곤과 고독 속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쳤다.
1932년 중국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1기생으로 입교.
 
1933년 4월 20일 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7월 서울로 잠입.
 
1934년 3월 20일 군사간부학교 출신이란 것이 드러나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남.
 
1943년 다시 [[독립운동]]에 나서 북경으로 갔고, 잠시 귀국한 틈에 붙잡혀 북경으로 끌려가 북경 동창호동(東廠胡同) 1호에 있던 일본총영사관 감옥(일본헌병대 감옥)에서 1944년 1월 16일 새벽 순국.
 
1990년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br/>
 
■【참고】 「신원카드」, 『독립운동사』 8권, 『이육사 평전』,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 30집·3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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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5일 (월) 14:23 판



개요

토머스 페인(영어: Thomas Paine, 1737년 1월 29일 ~ 1809년 6월 8일)은 18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국제적 혁명이론가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때 활약하였다. 1776년 1월에 출간된 《상식론》Common Sense[아메리카 식민지 주민이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침해 당한 권리를 알게 해서 보편적인 느낌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상식이 된다.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가 누군가 일깨우면 반향이 일어나며 동의하고 '전환'된다.]로 미국이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어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 책에서 봉건과 왕을 강하게 비판했다.[1] 미국 독립 전쟁 때《위기론》(Crisis)을 간행, 시민의 전투 의지를 끌어올렸다.



생애

영국 잉글랜드 노퍽에서 출생하여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 때 활약하였다. 영국의 퀘이커교도인 코르셋 제조업자 가정에서 태어나 13세까지는 학교에 다녔으나 가난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정치와 사회제도의 모순을 체득하였다. 런던에서 만난 벤자민 프랭클린의 소개로 1774년 10월 필라델피아로 이주, 1776년 1월 《상식론》(Common Sense)을 출판하여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큰 영향을 끼쳤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N.그린의 부관으로 종군하는 한편, 《위기론》(The Crisis, 1776∼1783)을 간행,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라고 하여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쓴 책으로도 이미 영향이 컸다. 1791년 《인간의 권리》(Rights of Men) 제1부를 쓰고 이듬해 런던에서 제2부를 썼으나, 반란 선동이란 죄명을 쓰게 되어 프랑스로 피신하여 의원에 선출되었다. 혁명 중에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 제1부(1794) ·제2부(1796)를 썼다. 그 책으로 자신이 -신은 있지만 인간과 교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는 가짜이고, 인간이 신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드러나서,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구속되어 있는 점을 이용해, 지배계급이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키기 위해 '무신론'이라는 이른바 '죄'를 만들어 씌웠다. 그 수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고 토마스에게도 예외 아니었다. 결국 나머지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손가락질 받았다. 180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도 지난날의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추악한 무신론자"로서 비난을 받았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신론적 입장[출처 필요]에서 쓴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 제1부(1794) ·제2부(1796)가 무신론이라는 오해[출처 필요]를 받게 되어- 에 대하여. 이신론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종교를 인정하는 건 말이 안된다. 유럽과 아메리카 기독교인은 당연시 이신론도 비난한다. 무신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신론 만으로도 무지하고 비논리적인 종교계의 배척을 받게된다. '무신론이라는 오해'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게 할 문장이다.

미국 독립 이후 잠시 정치에서 물러나 있던 페인은 1787년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790년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자 이에 반박해 1791년과 1792년 두 차례에 걸쳐 《인권》을 발표했다. 프랑스혁명을 옹호하고 영국인들에게 공화국을 세울 것을 호소한 이 글로 인해 페인은 영국에서 반역자로 몰려 법익을 박탈당하고 가까스로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후 프랑스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혁명세력에 동참해 활동하다가, 루이 16세의 처형을 반대한 이유로 룩셈부르크 감옥에 투옥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석방되었다.

1802년 페인은 제퍼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너무도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그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질시를 받았다. 결국 페인은 과거 독립혁명의 영웅이 아니라 혐오스런 무신론자로 배척당하다가 1809년 빈곤과 고독 속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쳤다.

주요활동

독립운동

  • 대구격문사건
  • 의열단 무장투쟁
  • 서대문형무소 수감


시 등 저서활동

  • 청포도
  • 광인의 태양
  • 광야
  • 계절의 오행


업적

  • 광주학생항일투쟁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졸업
  • 의열단 활동



저서

  • 광야

  • 청포도
  • 절정

외 30여 작품
작품 목록

제목 발표년도 비고
1930 첫 발표 시
春愁三題 1935 춘수삼제
黃昏 1935 황혼
失題 1936 실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1936
海朝詞 1937 해조사
路程記 1937 노정기
草家 1938 초가
江 건너간 노래 1938 강 건너간 노래
小 公 園 1938 소 공 원
鴉片 1938 아편
年譜 1939 연보
南漢山城 1939 남한산성
湖水 1939 호수
靑葡萄 1939 청포도
絶頂 1940 절정
班描 1940 반묘
狂人의 太陽 1940 광인의 태양
日蝕 1940 일식
喬木 1940 교목
西風 1940 서풍
獨白 1941 독백
娥眉 1941 아미
子夜曲 1941 자야곡
芭蕉 1941 파초
謹賀 石庭先生 六旬 1943 근가 석정선생 육순/이후 한시
晩登東山 1943 만등동산
酒暖興餘 1943 주난흥여
曠野 1945 광야/유시
1945 유시
소년에게 1946 유고시집《육사시집(陸史詩集)》
나의뮤즈 1946 유고시집《육사시집(陸史詩集)》
邂逅 1946 해후
바다의 마음  ?
蝙蝠  ? 편복

수필

  • 계절의 오행
  • 은하수
  • 창공에 그리는 마음

외 10여 작품


참고자료

이육사 한국 위키피디아 문서
이육사 문학관 홈페이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_이육사
이육사 위키문헌 문서
이육사 생가 위치(구글맵)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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