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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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정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5일 (토) 23: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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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87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여러 학문을 탐독하며 1888년 1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역임하는 등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업적

태인군수

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위 사진 속 비석은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이다.


금산군수

1909년 선생은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爲民行政)을 폄으로써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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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