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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창문사(彰文社)를 경영한 구자혁(具滋爀)의 아들로, 어머니는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했다. 2살 무렵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 장애로 얻게 되어 평생을 단신으로 살았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입문하였다.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운 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1928년 일본 가와바다 화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이과회 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귀국 이후 1934년 목일회, 1935년 백만회의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 비평활동도 전개했다. 이외에도 종합문예지 『청색지(靑色紙)』를 창간하여, 이상(李箱)·이육사(李陸史)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했다. 1952년 2월 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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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창문사]]를 경영한 구자혁(具滋爀)의 아들로, 어머니는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했다. 2살 무렵 가정부의 실수로 척추 장애로 얻게 되어 평생을 단신으로 살았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입문하였다.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운 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1928년 일본 가와바다 화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이과회 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귀국 이후 1934년 목일회, 1935년 백만회의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 비평활동도 전개했다. 이외에도 종합문예지 『청색지(靑色紙)』를 창간하여, 이상(李箱)·이육사(李陸史)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했다. 1952년 2월 2일 사망했다.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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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6일 (목) 05:24 판


개요

구본웅(具本雄, 1906년 3월 7일 ~ 1952년 2월 2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이다. 호는 서산(西山)이고, 자는 사영(士英)이다.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30년),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을 그린 〈우인상〉(1935년) 등이 있다.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를 통한 강한 주관성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도 불린다.

생애

190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창문사를 경영한 구자혁(具滋爀)의 아들로, 어머니는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했다. 2살 무렵 가정부의 실수로 척추 장애로 얻게 되어 평생을 단신으로 살았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입문하였다.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운 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1928년 일본 가와바다 화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이과회 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귀국 이후 1934년 목일회, 1935년 백만회의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 비평활동도 전개했다. 이외에도 종합문예지 『청색지(靑色紙)』를 창간하여, 이상(李箱)·이육사(李陸史)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했다. 1952년 2월 2일 사망했다.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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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2장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