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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한국사- 103「아리랑」과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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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 01:02 판


소개

생애

1902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 출감하였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다.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첫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아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에서 처음으로 주역(심봉사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듬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농중조」에 출연하여 절찬을 받음으로써 배우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를 직접 쓰고 감독·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1926년에 제작한「아리랑」은 조선 영화의 수준과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극찬을 받는다. 이후로 계속 문예작품의 영화화에 주력하였는데, 이때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그가 폐병으로 아픈 와중에도 끝까지 완성해낸 작품으로 1930년대의 가혹한 암흑시대에 삶의 종말을 맞이한 나운규의 심경을 절창한 작품이라고 할수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악덕과 난륜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그대로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작품종류

  • 운영전(雲英傳)
  • 심청전(沈淸傳)
  • 농중조(籠中鳥)
  • 옥녀(玉女)
  • 강건너마을
  • 아리랑
    • 철인도(후편)
  • 풍운아
  • 사나이
  • 무화과
  • 사랑을 찾아서
  • 벙어리삼룡

작품활동

관련콘텐츠

  • 영상한국사- 103「아리랑」과 나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