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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수산대학 농업마이스터대학 친환경채소과 이수
 
*한국농수산대학 농업마이스터대학 친환경채소과 이수
 
*한국농수산대학 평생교육원 약용작물과 이수
 
*한국농수산대학 평생교육원 약용작물과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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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본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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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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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일가를 이루지 않은 작은 삼촌도 함께 살았었다. 분명 집에 사는 사람은 많은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것을 계기로 결국 문헌정보학과에 오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튼,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하느라고,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을 얻는다고 아주 바빴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나보다 공부가 좋은가보다 했다. 혼자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다가 울기도 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일자리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무사히 자격을 얻은 엄마는 명일여고 근처의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집에서도 종종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리도 듣기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걸 질투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일하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엄마는 종종 즐거운 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고등학생이겠거니, 하면서.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엄마는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경영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직장을 잃은 엄마는 나를 맡겨두던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했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그걸 위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을 또 공부했던 모양이다.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거나, 새로 공부를 해야 했다거나 하는 사정은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내심 엄마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 오래 일할 수는 없었다. 재개발로 아동센터가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는 시기였다. 그때의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나는 모른다. 결국, 엄마는 새 직장을 구하는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마침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거들어 힘쓰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진하기에 앞서, 엄마가 한 일은 다시 공부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엄마가 졸업장을 자랑하던 날에야 알았지만, 그때 엄마는 경기 농업마이스터대학에 다니며 친황경 채소재배와 약용작물에 대한 걸 배웠다. 시험을 봐야 한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20년 6월 20일 (토) 00:13 판



소개

1970년 경기도 하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2004년 다시 하남으로 돌아왔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밝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바뀐다. 수학강사, 보육교사, 사회복지사로 일했으며, 지금은 고향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학력

  • 구천국민학교(現 상일초등학교) 졸업
  • 상일여자중학교 졸업
  • 명일여자고등학교 졸업
  • 세종대학교 행정학과 학사
  • 학점은행 사회복지학 학사
  • 한양대 평생교육원 보육교사 1급
  • 한국농수산대학 농업마이스터대학 친환경채소과 이수
  • 한국농수산대학 평생교육원 약용작물과 이수



딸이 본 엄마의 이야기

딸의 기억

고백하건대 나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일가를 이루지 않은 작은 삼촌도 함께 살았었다. 분명 집에 사는 사람은 많은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것을 계기로 결국 문헌정보학과에 오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튼,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하느라고,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을 얻는다고 아주 바빴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나보다 공부가 좋은가보다 했다. 혼자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다가 울기도 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일자리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무사히 자격을 얻은 엄마는 명일여고 근처의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집에서도 종종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리도 듣기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걸 질투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일하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엄마는 종종 즐거운 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고등학생이겠거니, 하면서.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엄마는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경영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직장을 잃은 엄마는 나를 맡겨두던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했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그걸 위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을 또 공부했던 모양이다.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거나, 새로 공부를 해야 했다거나 하는 사정은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내심 엄마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 오래 일할 수는 없었다. 재개발로 아동센터가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는 시기였다. 그때의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나는 모른다. 결국, 엄마는 새 직장을 구하는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마침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거들어 힘쓰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진하기에 앞서, 엄마가 한 일은 다시 공부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엄마가 졸업장을 자랑하던 날에야 알았지만, 그때 엄마는 경기 농업마이스터대학에 다니며 친황경 채소재배와 약용작물에 대한 걸 배웠다. 시험을 봐야 한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