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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0일 (토) 00:39 판



구술자 소개

개요

1970년 경기도 하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2004년 다시 하남으로 돌아왔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밝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바뀐다. 수학강사, 보육교사, 사회복지사로 일했으며, 지금은 고향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학력

  • 구천국민학교(現 상일초등학교) 졸업
  • 상일여자중학교 졸업
  • 명일여자고등학교 졸업
  • 세종대학교 행정학과 학사
  • 학점은행 사회복지학 학사
  • 한양대 평생교육원 보육교사 1급
  • 한국농수산대학 농업마이스터대학 친환경채소과 이수
  • 한국농수산대학 평생교육원 약용작물과 이수



딸이 본 엄마의 이야기

딸의 기억

엄마가 신나서 자랑하던 졸업장과 표창장.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고백하건대 나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일가를 이루지 않은 작은 삼촌도 함께 살았었다. 분명 집에 사는 사람은 많은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것을 계기로 결국 문헌정보학과에 오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튼,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하느라고,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을 얻는다고 아주 바빴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나보다 공부가 좋은가보다 했다. 혼자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다가 울기도 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일자리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무사히 자격을 얻은 엄마는 명일여고 근처의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집에서도 종종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리도 듣기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걸 질투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일하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엄마는 종종 즐거운 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고등학생이겠거니, 하면서.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엄마는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경영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직장을 잃은 엄마는 나를 맡겨두던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했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그걸 위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을 또 공부했던 모양이다.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거나, 새로 공부를 해야 했다거나 하는 사정은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내심 엄마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 오래 일할 수는 없었다. 재개발로 아동센터가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는 시기였다. 그때의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나는 모른다. 결국, 엄마는 새 직장을 구하는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마침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거들어 힘쓰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진하기에 앞서, 엄마가 한 일은 다시 공부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엄마가 졸업장을 자랑하던 날에야 알았지만, 그때 엄마는 경기 농업마이스터대학에 다니며 친황경 채소재배와 약용작물에 대한 걸 배웠다. 시험을 봐야 한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열심히 노력하던 엄마는 어엿한 한 사람의 농부가 되었다. 하우스 몇 개에서 철마다 오이, 상추, 가지를 돌아가며 키운다. 최근에는 청경채도 키웠다. 할아버지가 농사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후에는 나도 종종 일을 거들었지만, 지금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오신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겨울이면 상추에 이불을 덮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근력과 지구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로 가끔 부탁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싫었을까 하는 후회만 든다. 딸에게 힘든 일 시키기를 싫어하던 엄마가 굳이 부탁하는 일이면 참 급한 일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던 걸까.


외양간이 있었던 자리 앞에 이런저런 것들을 보관하는 비닐하우스가 생겼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잘 나온 것이 없다. 장독대 옆의 우거진 풀숲이 바로 외양간이 있던 자리다. 이제는 흙이 쌓이고 풀에 덮여서 거의 언덕처럼 보인다.


내가 없던 시기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 것은 할머니의 장롱에서 발견한 사진첩과 편지들 때문이었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군대에 있을 적에 보낸 편지들 가운데 딱 하나 엄마가 고등학생 때 쓴 편지가 있었다.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쓰게 시켰다던 편지 내용은 내가 고등학생 때 썼던 편지와 아주 흡사했다.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부러 장난스럽게 쓰는 편지. 나 때에는 써서 직접 부모님께 가져다드리도록 했기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전해진 적이 없었는데, 엄마 때에는 학교에서 직접 댁으로 편지를 부친 모양이다. 옛날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엄마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나는 문득 고등학생인 엄마를 상상했다. 아주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머리로는 엄마에게도 당연히 어린 시절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그 시기의 흔적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뒤이어 찾은 보육원 졸업 사진 속의 조그마한 엄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장롱 안에서 나온 사진첩에는 누렇게 낡은 사진이 잔뜩 있었다. 대학생 무렵의 엄마는 정말로 나와 똑같이 생겨서, 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소개도 전에 “어, 네가 혜원이 딸이구나!”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단하게 패인 주름이 한 줄도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볼 때마다, 궁금해졌다. 언제 찍은 사진일까? 왜 찍었을까? 웃고 있는 걸 보니 좋은 일이 있었을까. 고민이나 걱정거리는 없었을까? (물어본 결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을 받았다.)

우리 집을 배경으로 둔 사진에서 지금은 허물어진 외양간을 보았을 때는 너무 신기했다. 내가 보았을 때는 늘 지붕이 폭삭 내려앉고 덤불이 진 폐가였는데, 이때는 이 안에서 정말 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로 외양간이 있었다고 신기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소 똥냄새가 지독해서 싫어했지만, 갓 짠 우유는 맛있었다고 얘기해주었다.



엄마의 이야기